美 의사당 참혹했던 습격..역사는 알고 있다

강은영 입력 2021. 1. 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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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미·영 전쟁 때 소실됐던 美 의사당
1915년·1983년, 의사당 폭발 참사
1차 세계대전, 그레나다 침공 등 응징 세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6일 워싱턴 의회 의사당에 난입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수백명의 지지자들은 의사당 벽을 넘고, 창문을 깨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이어갔고,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민주주의 상징으로 꼽히는 미국 의회 의사당의 난입 폭력 사태는 전 세계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 지지자들이 집회를 열고, 다음 대통령이 될 당선인의 승리 확정을 결정짓는 순간을 방해하기 위해 의사당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이날 상황을 "반란"이라고 규정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충복으로 불렸던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이 폭력 사태를 "미 의사당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로 여겨지는 이 건물이 폭력에 의해 타격을 받은 것은, 안타깝게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 사실 알고 계셨나요.

①1814년, 영국군에 의해 불태워지다
7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의 난입 폭력사태가 벌어진 미국 워싱턴 의회 의사당이 자욱하게 안개에 싸여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미 의사당이 공격 받은 가장 유명한 사건은 1814년 8월 27일 영국군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침공한 후 이곳을 불 질러 버린 일입니다. 당시 미국은 독립 후 영국과 또 다시 전쟁(영미전쟁·1812~1815)을 벌였고, 그럼에도 그간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의사당 재건도 한창이었죠.

그러나 영국군은 가차없이 의사당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1811~1813년까지 캐나다(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전쟁을 벌였는데, 1813년 미국이 영국의 요새인 '포트 요크' 지역을 공격해 함락시켰죠.

그러나 승리다운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영국군 전사자는 150여 명이었지만 미국군 전사자는 그 2배에 달했다고 해요. 분노한 미군은 이곳 의사당과 총독 관저 등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후 영국군을 이끌던 로버트 로스 장군은 워싱턴 DC를 침공, 포트 요크가 당했던 수모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다고 해요. 미 의사당은 물론 백악관을 포함한 주요 공공건물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알 수 없다고도 하죠. 워싱턴 DC를 함락하고 볼티모어까지 침공한 영국군은 이곳의 요새를 뚫진 못했습니다. 미국은 볼티모어 요새에서 휘날리던 불탄 성조기를 보관한 뒤 현재 박물관에 전시하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으니까요.

2014년 미국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200년 전 영국군이 백악관 등 주요 건물을 훼손한 것에 반성한다는 의미의 케이크를 만들었다. 영국대사관 트위터 캡처

2014년 미국 주재 영국대사관은 200년 전 영국군이 불태웠던 백악관 모형을 케이크로 만들어 반성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국대사관은 폭죽에 둘러싸인 백악관 케이크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항의만 받고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폭죽이 문제였던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세상 맛 없어 보이는 케이크"라며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②1915년, 독립기념일에 터진 다이너마이트
6일 수백명의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미국 워싱턴 의회 의사당에 난입하려 하자 총을 든 의사당 경찰들이 문을 막고 있다. BBC방송 캡처

영국의 공격을 받은 후 한 세기만에 미 의사당은 또 다시 수난을 겪습니다. 1915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의사당 상원 회견실에서 3개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했는데요.

사망자는 없었지만 의사당 내부가 심각하게 훼손됐습니다. 범인은 하버드대에서 교수로 일했던 에리히 뮤엔터라는 독일인이었다고 해요. 그는 나중에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재정 지원해 독일을 적으로 상대한 미국 금융가들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는 '워싱턴 이브닝 스타'라는 필명으로 글도 썼는데요. 그는 당시 폭발에 대해 "전쟁을 요구하는 목소리 위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소음을 냈으면 한다"면서 "이 폭발은 평화를 향한 내 호소이자 외침"이라고 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건 그가 폭발 사건 이후 금융가인 J.P. 모건 주니어 집을 찾아가 총을 쏜 뒤 총상을 입힌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건의 집사에게 제압당해 체포됐고, 후에 교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③1954년, 푸에르토리코 민족주의자들의 공격
1954년 미국 워싱턴 의사당에서 총기를 난사한 뒤 체포되는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주의자들. 로리타 르브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이들 중 리더였다. AP 연합뉴스

1954년 3월 1일 미 의사당 하원의 방문객 갤러리에 침입한 4명의 괴한은 총기를 난사했습니다. 이들은 카리브해 끝자락의 섬나라 푸에르토리코 민족주의자들이었는데요. 이들의 총기 난사로 하원의원 5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들 중 리더였던 여성 로리타 르브론은 체포되는 동안 "나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푸에르토리코를 위해 죽으러 왔다"고 외쳤습니다. 르브론은 당시 징역 50년, 총을 난사한 다른 남자 3명은 75년을 선고 받았어요.

지금이야 미국의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지만, 1950년 미 의회에 의해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연방 정부에 통합하거나 자치 정부 수립을 말이죠. 이에 푸에르토리코는 1952년 자체의 헌법을 채택해 미국의 자유 연합주 지위로 통합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독립을 원했던 민족주의자들이 의사당을 침입하는 대형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1967년 7월 푸에르토리코는 또 다시 자치령 혹은 미국의 1개 주로 승격 및 독립 중에서 택일해야 했고 국민 투표를 실시했어요. 국민의 60%가 미국의 자치령을 선호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총격으로 의원들이 중상을 입긴 했지만 미국은 온정을 베풀었다고 해요.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들 4명에 대해 감형하고 석방시켰습니다. 당시 행정부는 "이번 석방은 중대한 인도주의적 제스처가 될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그렇게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죠.

이들 4명은 푸에르토리코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귀국했습니다.

④1983년, 무장저항단체의 폭탄
6일 미국 워싱턴 의사당 앞에서 수백명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의사당은 무장저항단체에 의한 폭발로 또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1983년 11월 7일 상원 2층에서 폭탄이 터져 회의실 등이 훼손되는 참사가 벌어진 겁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폭탄이 터지기 몇 분 전 의회 전화 교환대에 벨이 울렸어요. 자신을 무장저항단체의 일원이라고 밝힌 사람은 곧 폭탄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폭탄은 "미군의 그레나다 침공 및 레바논 사태 개입에 대한 보복"이라는 말도 남겼습니다.

미국은 같은 해 10월 25일 자주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던 그레나다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그레나다는 인민혁명정부 지도부의 급진파와 온건파의 갈등으로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를 빌미로 자메이카 등 친미 성향 카리브해 6개국과 공동 파병 형식으로 무력 침략한 것이죠. 섬을 점령한 미군은 그레나다의 급진파 지도자 등을 체포하는 등 내정 간섭 조치도 단행했습니다.

결국 1988년 미 연방수사국(FBI)은 이 사건의 무장저항단체 소속 7명을 체포했습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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