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딸, 모범생 아들 부러워하지만.. 우리 부부는 지금 '연극'중입니다

2021. 1. 9.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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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일러스트= 안병현

잘난 사람, 가진 사람, 받은 사람…. 사방에 부러운 사람들이 넘칩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부러워할 어떤 허깨비들을 상상하며 살지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던가요? 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긴 걸지도요. 적어도 허깨비는 아니겠지요.

/홍여사

“너희 둘째 이번에 수능 봤지? 어떻게 됐어? 잘 봤어?”

친구의 질문에 저는 잠시 당황했습니다. 요즘은 서로 안 묻는 게 매너인 분위기라 그녀처럼 돌직구로 시험 잘 봤느냐고 묻기부터 하는 사람은 잘 없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 경혜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애들 얘기를 묻는다는 게 좀 뜻밖이었거든요. 나는 대답할 말을 조심스레 골랐습니다. “어, 보긴 봤는데 몰라. 어디든 붙어야 잘 본 거지.”

“원하는 데 꼭 합격할 거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했잖아. 큰애도 둘째도.”

“잘하긴 뭘….”

“겸손 떨지 마. 오늘은 나도 자랑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실은 우리 진호도 이번에 수능 봤다. 자퇴하고 2년 내내 틀어박혀 게임만 하다가, 작년 여름부터 공부해서 수능 한 번 보고, 올해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또 봤어.”

“어머, 어머, 얘. 너무 잘 됐다.”

“점수도 많이 올라서, 그동안 언감생심이던 학교들을 노려보고 있단다. 아직 원서도 쓰기 전이지만, 자랑부터 미리 하는 거야. 떨어지더라도 나는 아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당연히 자랑할 만하지. 대단하다. 축하해.”

“그동안 내가 속 좁게 널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모범생 엄마인 네가 늘 부러웠는데, 재작년, 네가 큰애 대학 보내던 그때는 부럽다, 축하한다는 말조차 아파서 차마 할 수가 없었어. 우리 진호는 그때….”

들뜬 목소리이던 경혜는 잠시 목이 메는 듯했습니다. 나는 이해한다고, 다 잘 되었으니 웃으며 돌아보자고 말했고,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학교 때부터 절친인 데다 동갑내기 아들을 키우며 서로 의지도 하고, 은근히 경쟁도 하던 우리 사이는 경혜의 아들이 사춘기를 지독히 앓으며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떨어지는 학업 성적을 걱정하던 경혜는 차츰 교우 관계와 품행까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이가 기어이 고교를 자퇴한 뒤로는 아예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자연히 저도 애들 얘기, 학교 얘기는 삼가게 되더군요. 안색으로만 짐작하는 경혜네의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경혜의 아들이, 올해 수능을 치렀다는 겁니다. 수능을 보려고 일 년 반이나 열심히 공부했다는 겁니다. 저는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거 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잖아.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나의 말에 경혜는 나직이 웃으며 일침을 놓더군요.

“그건 아니야. 부모가 기다려주는 동안은 정신 못 차리더라고. 내가 애 때문에 우울증이 심해져서 애 아빠하고도 극도로 안 좋아졌었거든. 이혼하려고 집 내놓고, 수속 밟기 시작하니까 그제야 이 녀석이 앗 뜨거라 싶던가 봐.”

“......”

“걱정하지 마. 이혼은 안 했어. 애가 변하기 시작하니까, 우리 관계도 다시 회복되더라. 아, 지금은 그저 모든 게 한바탕 꿈 같아.”

경혜의 목소리는 정말 길고 무서운 꿈에서 막 깨어난 듯 몽롱하게 떨렸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 몇 번이나 더 “우등생 엄마인 네가 늘 부러웠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목소리였습니다. 부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나인 듯했지요.

그러나 나는 끝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서야 깨달았지요. 경혜는 자신의 옹졸함으로 우리 사이가 한동안 소원했었다 말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녀는 나보다 솔직한 사람입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의 절반은 분명히 내가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긴 악몽을 꾸고 있었다면 나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단꿈 속에서 서글픈 현실로의 복귀를 예감하며 떨고 있었달까요?

그토록 금슬 좋던 경혜 부부가 아이 문제로 이혼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이 현실에 비일비재한 일이라면, 이런 건 어떨까요? 애정도, 의리도 더는 남아 있지 않고 일상적인 평화조차 나눌 수 없는 절망적인 부부가 오직 아이들 때문에, 부모와 비교하면 월등히 뛰어난 아들과, 너무도 성실한 딸 때문에 무늬만 부부로 몇 년을 버티는 것…. 아이들에게 미안해서라기보다는 그 애들이 아까워서, 그 애들의 멀쩡한 부모로 불리고 싶어서 멀쩡한 척하며 사는 것….

조용히 별거한 지 이 년 만에 우리는 아이들 때문에 다시 조용히 합쳤답니다. 아들은 거짓말처럼 다시 1등 자리로 돌아왔고, 딸아이는 야무진 모범생으로 돌아왔지요. 남편과 저는 그 모든 상처와 비난과 의심을 괄호 안에 넣어두고, 애들 얘기만 주고받으며, 그것으로 연료를 삼아 지난 몇 년을 버텨왔습니다. 온갖 테스트 결과, 매학기 시험 성적, 각종 임명장, 선생님의 평가, 동네 엄마들의 시기 어린 칭찬들....

그러고 보면 저는 그동안 사람들의 가면 쓴 부러움을 먹고 연명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정에 배곯고, 믿음에 목말랐으니, 타인들의 거짓 부러움으로라도 배를 잔뜩 불려야 했나 봅니다. 그러나 오늘 절친인 경혜가 ‘부러웠었다’ 고백하니 제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그동안 경혜와의 대화가 힘들었던 건 그녀의 시샘 때문이 아니라, 내 비밀 때문이었습니다. 나야말로 다정한 경혜의 결혼 생활이 아프도록 부러울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 말을 아직도 쿨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경혜의 나쁜 꿈은 끝이 났고, 나의 거짓 꿈은 아직 진행 중이어서? 경혜를 기다리는 현실이 새싹 움트는 새봄이라면 내가 돌아가야 할 현실은 서글프고 추운 겨울이라서?

두 아이 대학 갈 때까지만이라던 우리 연극의 막은 이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제목의 새 연극을 무대에 올려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나도 그 극에 속아 눈물 흘리며 손뼉을 칠 수 있을까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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