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우리가 정인이 엄마다”
묻힐 뻔한 사건 살려낸 건 이름 없는 엄마들이었다
엄마가 된 후 아동 학대란 제목 달린 기사는 겁이 나 못 보겠다. 그래도 정인이 사건은 외면할 수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 겨우 열여섯 달 살다 간 아이. 그 짧은 생에서 친부모에겐 버림을, 양부모에겐 죽임을 당했다. 아빠, 엄마, 맘마 같은 투명한 말을 병아리처럼 쏟아내는 때, 멍투성이 몸으로 부서진 뼈와 터진 장기를 품고 고통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사흘 전 양평에 있는 정인이 묘를 찾았다. 한 교회에서 수목장으로 조성한 어린이 공원 묘지, 영하 15도 한파 속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나무수국 아래 정인이가 있었다. 추모객이 가져다 놓은 선물 꾸러미가 차가운 땅에 잠든 아이를 이불처럼 덮어주고 있었다.
명패 두 개가 보였다. ‘안율하’라고 적은 작은 명패와 ‘우리 딸 많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고 새긴 ‘정인 나무’ 푯말. 안율하는 양부모가, 정인은 입양 전 생모가 지은 이름이다. 푯말의 정체가 궁금해 묘지를 운영하는 송길원 목사에게 물었다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두세 달 전부터 이름 모를 엄마들이 돌아가며 와서 푯말 세우고 묘를 돌봤단다. 지난 주말 들끓었던 방송도, 이들의 집요한 제보 덕에 이뤄진 것이었다.
수소문해 그중 한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정인이 묘를 처음 찾아갔다는 세 아이 엄마 최수진씨였다. 두세 달 전 정인이 기사가 나온 무렵 각자 눈물 훔치던 엄마들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로 모여들었다. 11월 중순 정인이 묘지 주소가 카페에 공유되자마자 달려간 최씨는 액자 하나 달랑 놓인 채 방치된 아이 묘를 보고 넋 놓아 울었단다. 비에 젖은 아이 사진을 가져와 복원해 다시 가져갔다.
따끈한 밥 지어 온 엄마도 있었다. 일면식 없는 엄마들이 똘똘 뭉칠 수 있었던 힘은 딱 하나.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들은/ …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저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다’는 나희덕 시(어린 것) 구절처럼 엄마의 저린 가슴이 이어졌다. 사회가 외면한 아이에게 “우리가 정인이 엄마”라고 자처한 사람들이다.
대부분 집회 한번 나간 적 없는 평범한 엄마들이 두 달 넘게 양천경찰서, 홀트아동복지회, 서울 남부지방검찰청을 돌며 시위했다. 남부지검 앞 릴레이 시위 마지막 날이던 크리스마스 이브엔 산후조리원에서 막 퇴원한 산모가 동참하겠다고 왔다. 말리다가 딱 1분만 세워주며 온 멤버가 부둥켜안고 울었단다.
과열·악용 우려까지 낳고 있는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의 출발도 이들이었음을 알았다. 협회 공혜정 대표를 중심으로 컴맹 수준 엄마들이 밥하다, 기저귀 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관련 글을 공유하고, 언론사에 제보했다. ‘맘 카페’에 청원 글 공유했다가 ‘강퇴’당한 적도 수차례. 이들에겐 지금의 추모 열기가 반가우면서도 낯설다.
손톱만 한 눈송이 같은 엄마들의 분노가 하나둘 모여 주먹만 한 눈 뭉치가 됐고, 눈 뭉치를 굴려 눈덩이 같은 공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돌아가는 걸 보고 있자니 상명지통(喪明之痛) 심정으로 엄마들이 쌓아 올린 탑이 맥없이 무너질까 봐 벌써 걱정된다.
며칠 전 경찰청장의 사과를 보며 기대는 접었다. 죄송하다, 담당자 바꾸겠다는 급조한 면피성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시간 걸려도 예산을 얼마 투입해, 학대 시그널을 포착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어떤 식으로 갖춰 현장이 굴러가게 하겠다는 식의 구체적 안이 듣고 싶다. ‘정인이법’이라며 여론에 편승해 법안 쏟아낸 국회의원에게도 따지고 싶다. 그 사이엔 일 안 하고 뭐 했느냐고. 제발 뒤늦게 숟가락 얹지 마시라. 이유식 만들어 ‘진짜 숟가락’ 꽂아 무덤에 올린 사람은 대가 없이 모인 엄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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