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

한윤정 전환연구자 2021. 1. 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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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새해 1월1일 0시, SNS에 새 메시지가 떴다. 거리 두기로 취소된 보신각 타종행사 대신 한강 위에서 펼쳐지는 드론쇼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누군가 새해 인사를 정시에 맞춰서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여니 한 청년 기후활동가로부터 연대서명을 촉구하는 선언문이 도착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에서 활동하는 그는 한국이 베트남에 짓는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반대운동을 한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국내외로부터 수많은 비판과 철회 요구가 있었음에도 베트남 붕앙-2 석탄화력발전소 ‘수출’은 추진되고 있고, 2021년에는 첫 삽을 뜨게 됩니다. 이를 방조하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부끄럽습니다. 2050 탄소중립과 그린뉴딜을 추진하며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 기후악당 한국정부, 말로만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붕앙-2에 참여한 ‘탄소오적’, 한국전력·삼성물산·두산중공업·수출입은행·하나은행의 행보에 분노하고 이들을 규탄합니다. 붕앙-2는 철회되어야 하고 철회할 수 있습니다.”

‘붕앙-2.’ 대다수에게 낯선 이름일 것이다. 올해부터 2025년까지 베트남 하노이 남쪽 하띤성에 지어질 이 발전소는 공사비 2조6000억원 규모에 1200㎿ 용량으로 가동 기간 중 약 2억t의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한국판 뉴딜에 따라 국내에서 5년간 감축하는 온실가스 1200만t의 16배가 넘는다. 더구나 중화전력공사, 제너럴일렉트릭, 스탠더드차터드은행 등이 탈탄소 선언과 함께 공사에서 철수한 마당에 한국이 뛰어들었다. 한전이 초기 사업주였던 중국의 지분을 인수했고 두산중공업과 삼성물산은 설계·조달·시공, 하나은행은 대출계약, 수출입은행은 여신지원을 맡아 ‘팀 코리아’의 저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환경단체의 반발은 물론, 한전 주주인 투자기관들마저 중단을 요구했지만 이사회는 작년 10월 초 사업을 확정했다. “국가 간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협의해온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붕앙-2는 주민들의 반대로 베트남에서 10년 이상 지체된 사업이다. 붕앙-1 발전소 가동 이후 2017~2018년 사이 심혈관 및 뇌졸중 환자가 105명 발생했고 14명이 사망했다는 게 지역보건소의 주장이다.

그런데 붕앙-2 계획이 확정되고 한 달도 못돼 문재인 대통령은 ‘2050 대한민국 탄소중립’을 선언했으며 한전과 삼성물산도 동시에 탈석탄 선언을 했다. 붕앙-2를 비롯해 인도네시아 자와 9·10호기, 강릉 안인 1·2호기 등 이미 결정한 석탄화력발전소는 계속 짓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탈석탄과 함께 ESG(환경보호·사회공헌·윤리경영)를 강화한다는 내용은 주가의 호재로 작용했다.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은 지금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했다. 낮과 밤이 바뀌는 황혼 무렵, 내 앞에 나타난 짐승이 나와 친숙한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구별되지 않는 시간을 뜻한다. 대통령, 국회, 정부, 지자체, 기업까지 나서서 기후위기를 말하는 지금은 분명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선언이 녹색분칠인지, 진정한 전환의 시작인지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 활동가들 의견에는 한 치의 논리적 허점도 없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탄소중립은 국내정치용 쇼가 아니다. 우리가 줄여도 다른 나라가 늘리면 소용없다. 세계는 한배를 탄 운명공동체다.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가 간 약속을 내세워 화력발전소를 짓는 것은 제국주의적 생태학살이다. 적어도 한전, 수출입은행 같은 국책기관은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지난해 코로나19와 최장기간의 장마 덕분에 기후운동은 약진했다. 정부는 그린뉴딜 구상을 발표했고,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대응 촉구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기후위기대응·에너지전환 지방정부협의회도 발족했다. 기후위기로 인한 현재 세대의 불평등, 미래 세대의 생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기후위기는 이제 우리 사회의 주류담론이 됐다. 그러나 ‘BAU(Business As Usual)’, 즉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을 중지할 때만 진정성이 생긴다.

기후운동이 제도권에 ‘포섭’되면서 더욱 절박해진 활동가들은 직접행동에 나서고 있다. 지난 11월 국회기후변화포럼 주최로 ‘2050 장기저탄소발전전략 공청회’가 열리는 국회 앞에서 멸종반란한국 활동가들은 2030년에 맞춰진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라며 철문에 자전거 자물쇠로 목을 묶었다. 이들은 5가지 혐의로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됐다. 청년기후긴급행동은 작년 10월 같은 주제의 국민토론회 회의장에 난입했으며 올해 붕앙-2 반대를 위한 직접행동을 예고했다. 개와 늑대를 구분하고자 나선 기후시민들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지원할 때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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