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당선자, 어느날 불쑥 비밀 인사위에 문재인을 데려왔다

2021. 1. 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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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문재인 / 참여정부 창업공신 염동연 회고록] [1] 2003년 부산파의 등장
2002년 노무현 후보와 악수하는 문재인 변호사 - 2002년 5월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문재인 변호사와 악수하고 있다. 염동연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집필 중인 회고록에서“당시 문 변호사는 줄곧‘나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언저리에 갈 일이 없다’며‘내게 제발 선거운동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오른쪽 둘째는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의‘멘토’로 불린 송기인 신부. /연합뉴스

2003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노무현과 나는 정부 요직 인사에 대해 자주 얘기했고, 때에 따라 당선자 개인 일도 나와 수시로 상의했었다. 신정(新正)을 지나 안가에서 노무현 당선자와 만난 어느 날이었다. 당선자는 내게 “인사위를 구성합시다”하고 얘기를 꺼냈다.

“지금 당에서 가동되고 있잖아요?”

“그 인사위 말고, 정부 내각부터 시작해서 소위 대통령이 직접 인사해야 할 사람들을 준비하는 작업을 해야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구성하면 좋겠습니까?”

“아 뭐 저 김원기 상임고문, 문희상 청와대비서실장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비서실장 등으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염 총장님까지 포함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비공식 인사위원회를 꾸렸고, 소공동 롯데호텔 소회의실을 빌려 두 차례 회의를 했다. 하지만 두 번의 회의는 인사위원회들 간 상견례 수준에 그쳤다. 기본 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인선을 검토하는 수준에도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세 번째 회의에 문재인 변호사가 나타났다. 당시 문재인은 이호철을 대동했다. 당선자는 “앞으로 이 회의에 부산의 문재인 변호사를 참석시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참석자들에게 문재인을 소개했다. 정규 멤버가 한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 문 변호사를 처음 보았다. 일어나 그와 악수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어쩐지 같이 앉아 있기가 싫었고 벌떡 일어나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재인은 내심 부산에서 그의 역할을 기대했던 우리 캠프 참모들에게 야속하고 서운한 사람이었다. 당시 문재인이 줄곧 해온 이야기는 이러했다.

민주당 노무현 대선경선 후보가 2002년 4월 23일 염동연 캠프 사무총장(가운데), 유종필(사진 우측) 언론특보 등과 함께 참모회의를 갖고 있다./조선일보 DB

“나는 어떤 경우에도, 설사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 언저리에 갈 일이 없다. 내게 제발 선거운동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 마라.”

그랬던 문 변호사는 대선 투표일을 두 달 남기고서야 마지못해 부산 지역 대선 캠프에 참여했다. 그리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돼도 절대로 안 나타나겠다던 사람이 비공식 인사위 회의 석상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나는 혼자서 ‘노무현이 간곡하게 간청했을까? 그렇다 해도 나타날 수 없는 사람인데… 내 정서로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생각해보니 이렇게 인사위를 계속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자를 찾아갔다.

“인사위 해체합시다.”

“왜 그러세요?”

“이게 비공식 기구인데 잘못하면 보안이 안 될 것이고 보안이 안 되면 이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람이 줄을 대고 잡음이 일 것입니다. 잘못하면 큰 말썽만 납니다. 이 인사위가 어떤 형태로든 세간에 노출되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 비공개 인사위는 해산됐다. 지금까지 이 인사위의 활동을 아는 사람은 당시 참석자 외에는 없고 언론에 한 번도 노출되지도 않았다. 노 당선자가 비공식 인사위를 따로 만든 데는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민주당 주류로부터 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이 작용한 것 같다. 노무현에게 자신이 신뢰할 만한 당내 맨 파워가 부족하다는 것은 정권 초기 그에게 상당한 부담이 됐다. 그는 늘 소수였다. 더구나 청와대에는 나와 안희정이 못 들어가게 되니 결국 믿을 만한 직계 참모는 이광재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청와대에서도 ‘외로운 섬'에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노무현은 이제 문재인, 이호철 같은 부산에서 같이 활동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을 청와대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당이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민주당이 노무현 후보를 흔들어대지 않았다면 소위 ‘부산파’를 끌어올려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로 인해 청와대 내에서도 ‘부산 정권’이란 말이 횡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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