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공주옷, 나를 사랑하라
복온·덕온 공주 옷 바탕 21벌 제작
경복궁 배경 영상·화보 SNS 공개
당의 앞뒤 수놓은 '문자도' 눈길
"동서양의 복식사 함께 고민 중"
“내가 지금 궁궐에 사는 공주라면 어떤 옷을 입을까?”
‘코리아 인 패션’ 프로젝트의 첫 번째 패션 디렉터로 선정된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51)의 상상력은 어린아이 같은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코리아 인 패션’ 프로젝트는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심 속 궁궐을 배경으로 한복 패션 동영상과 화보를 제작해 전 세계에 ‘한국의 미’를 알리려고 시작됐다. 경복궁 근정전을 배경으로 12명의 모델과 함께 진행한 영상과 화보는 지난달 24일 유튜브·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순조의 둘째 딸인 복온 공주의 활옷, 셋째 딸인 덕온 공주의 원삼 등 조선의 공주들이 주요 의식에 입었던 대례복, 소례복으로 입던 당의를 기반으로 총 21벌을 만들었다. 디자인 콘셉트는 ‘고증과 상상, 그 사이’다. 실존하는 유물을 원형으로 하되, 디테일은 김 디자이너가 상상력을 발휘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복온 공주가 혼례 당일 입었던 활옷에는 연꽃·불로초·목단·석죽화·불수·국화·불윤화·천도·석류·나비 등 화조문 10종이 수놓아져 있다. 김 디자이너는 이 화려한 자수 장식을 앞치마처럼 치마 위에 길게 늘어뜨려 21세기 버전으로 선보였다.
너희가 핑크를 알아?
핑크와 블랙을 많이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핑크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태어났지만 사료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삶을 살았던 조선의 공주들을 위해 김 디자이너가 선택한 진혼의 색이다. “행복한 공주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또 요즘 사람들은 핑크를 여성스러운 색이라고 비하하는데, 여성의 본질인 여성스러움이 왜 그런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안타까워서요. 존중받아야 할 덕목인 여성스러움을 무시하고 젠더리스만이 트렌디하다고 생각하는 데 반기를 들고 싶었고, 제대로 된 아름답고 우아한 핑크란 이런 거다 보여주고도 싶었죠. ‘너희가 핑크를 알아?’ 이렇게 말이죠. 하하하.”
그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델들의 머리에 조선시대에는 없던 깃털 장식과 티아라를 씌웠다. ‘공주’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릴 법한 머리 장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복은 옛날 옷이 아니에요. ‘우리 옷’이고, 조선시대 한복, 고려시대 한복, 삼국시대 한복이 다 달랐어요. 그렇다면 현대인들에게 어울리는 한복, 미래의 한복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처럼 우린 ‘한복’이라는 단어에 발목 잡혀 있다. 일상에서 입는 옷을 한복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에, 한복은 언제나 조선시대에 입던 ‘옛날 옷’이라고만 정의된다. 그는 그런 생각을 깨고 싶다고 했다.
일본의 한 패션 잡지는 그를 ‘한복계의 샤넬’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여러 브랜드가 만들고 있는 ‘블랙 미니 드레스’라는 패션 아이콘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코코 샤넬이다. 김영진의 한복이 그만큼 미래의 한복 아이콘을 제안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실제로 ‘신한복’의 대표 의상으로 꼽히는 ‘철릭 원피스’를 처음 만든 사람이 그다. 조선 후기 벼슬아치들이 입었던 군복의 일종인 철릭은 상의와 주름 잡은 치마형 하의가 연결된 남성복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16호로 지정돼 있는데, 김 디자이너는 이 철릭을 가슴 아래부터 퍼지는 단아한 여성용으로 고안했다. 여밈을 풀어헤치면 가벼운 롱재킷으로, 원피스 위에 모시 치마를 덧입으면 풍성한 드레스로 바뀐다. 이 외에도 16세기 복식인 ‘연안김씨 저고리’를 현대인의 외투로 재해석하고, 겨울철에 유용하게 니트로 짠 한복 저고리도 선보였다.
‘한복계의 샤넬’을 꿈꾸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여주인공인 ‘애기씨’ 김태리의 의상을 만들고, 오페라 ‘동백꽃 아가씨’와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화전가’의 무대 의상을 감독하고, 한샘 중국 지사 유니폼을 디자인하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종횡무진하는 김 디자이너는 패션이나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의 관심사는 현실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공연 무대였다. 1990년대를 연극판에서 청춘을 바친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먹고 살기 위해’ 패션 업계에 발을 들였다. 관련 경력은 없었지만 인사 담당자 앞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2시간을 떠들어 댄 덕분에’ 패션 브랜드에 입사할 수 있었고, 수입 정장 브랜드 ‘체루티’를 거쳐 ‘루이 비통’의 슈퍼바이저로 남성복 의류팀장을 지냈다. 이후 침선장이었던 고 박광훈(서울시 무형문화재 11호) 선생을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한복을 배웠고, 4년 뒤인 2004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다.
“명품 업계에서 일했던 게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서양의 입체 재단을 많이 들여다봤고 또 공부하면서 우리 옷과 서양 옷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됐죠. 오랜 역사를 가진 명품 브랜드의 발전사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에 맞게 한복이 변신하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저는 지금도 동서양의 복식사를 함께 연구합니다. 김치를 매일 먹지만 와인과 치즈도 좋아하니까요.” 21세기형 ‘크로스오버’ 콘텐트를 위해 귀 기울일 조언이다.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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