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증언 30년만에.."일 배상하라" 한국법원 첫 판결
법원 "반인권적 위안부 범죄
일본 정부 주권면제 안 된다"
스가 총리 "소송 기각돼야" 반발
정의연 "기념비적 판결"
한-일 여건상 집행은 쉽지 않아
법원이 ‘국내 법원이 외국 정부에 대한 소송에서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국제 관습법상의 주권면제(국가면제) 원칙을 깨고,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편적 정의와 인권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첫 판결이라는 의미가 깊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반대를 꺾고 배상금을 받아낼 실효적 수단을 찾는 게 쉽지 않아 ‘상징적 결론’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정곤)는 8일 고 배춘희 할머니 등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일본 정부가 1억원씩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2016년 1월 사건이 정식 재판으로 회부된 뒤 5년 만의 선고다.
이번 판결의 ‘핵심 쟁점’은 보편적 인권 기준에서 판단할 때 명확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인 위안부 문제에 주권면제 원칙을 적용해야 할지 여부였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위안부 제도는 “일본 제국에 의해 계획적·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으로 이 사건의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 해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 피고(일본 정부)가 국가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파괴하고 반인권적 행위로 인해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가했을 경우에까지 (원고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최종적 수단으로 선택한 민사소송에서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부당한 결과가 도출된다”고 판단했다.
1991년 8월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첫 고발’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한 정치적 타협(1995년 아시아여성기금), 일본 법원을 통한 소송(3건 모두 패소), 한-일 정부 간 외교적 타협(2015년 12·28 합의) 등 30년에 걸친 길고 긴 우여곡절 끝에 한국 법원이 피해자들이 소망해온 ‘법적 배상’ 요구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이 판결은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의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판단할 때 ‘당연한 결론’이라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대법원은 일제 강점기에 이뤄진 강제동원 피해가 1965년 한-일 협정에 포함되지 않은 ‘반인도적 불법행위’라고 판단하며, 원고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판결이 나온 상황에서 그보다 더 위중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배상 요구를 ‘주권면제’를 이유로 들어 배척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정신과 인류의 보편적 정의 관념에 비춰 볼 때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심을 담아 재판부는 “절대규범을 위반하여 타국의 개인에게 큰 손해를 입힌 국가가 국가면제 이론 뒤에 숨어서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기회”를 줘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한국 앞에 가로놓인 외교 현실로 눈을 돌릴 때 이 판결이 원만히 집행되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앞선 대법원 판결 때도 원고인단이 판결 이행을 위해 일본 기업 자산의 압류·매각 절차를 진행하자, 일본 정부는 크게 반발하며 2019년 7월 반도체 생산에 꼭 필요한 3개 물질의 수출규제를 강화하는 등 ‘보복 조처’를 쏟아냈다. 이후 한·일 양국에서 서로를 향한 분노와 증오의 목소리가 쏟아지는 등 한-일 관계는 사상 최악의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날 판결의 피고인 일본 정부는 판결 자체를 ‘국제법 위반’이라 주장하며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이날 오후 총리관저에서 기자단을 만나 “국제법상 주권국가는 타국의 재판권에 따르지 않는다”며 “소송은 기각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1965년 일-한(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밝혔다. 아키바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8일 남관표 주일 한국대사를 불러 “국제법상 주권면제 원칙을 부정하고 원고의 청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낸 것은 매우 유감이며 일본 정부로서는 이 판결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만약 앞으로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등 원고인단이 일본 정부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에 나선다면 양국 관계는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7월 도쿄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활용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한다는 정부의 계획도 난망해진다. 외교부는 오후 대변인 논평을 통해 “정부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나갈 것이다. 이 판결이 외교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일 양국 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계속될 수 있도록 제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스가 요시히데 총리 취임 이후 이어온 한-일 관계 개선 노력에 악영향이 없도록 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길윤형 김소연 장예지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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