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21. 1. 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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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유족 "용납 못해"..민주노총 "여야가 '개악' 경쟁"

[곽재훈 기자(nowhere@pressian.com)]
'개혁 후퇴'라는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강한 반발 속에서도, 국회가 원안과 크게 달라진 내용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을 8일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시켰다.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 의결에 이어 본회의 처리까지 이날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이뤄진 결과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해온 노동·시민단체와 진보진영에서는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 "중대재해기업 보호법"이라는 탄식이 나왔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을 재석 266인에 찬성 164표, 반대 44표로 가결시켰다. 기권은 58표였다. 여야 지도부 간 합의 처리된 법안임에도 찬성률은 높지 않은 편이다. 2021년 초 현재 양당이 보유한 의석 수는 더불어민주당 174석, 국민의힘 102석이다. 양당 합의 법안에 대한 찬성표 수가 민주당 보유 의석 수에도 미치지 못한 셈이다.

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된 후, 그간의 긴 논란을 반영하듯 법사위 여당 간사인 백혜련 의원이 약 10분간 이례적으로 긴 법안 제안설명을 했다.

백 의원은 노동계와 재계의 반대 등을 각각 언급하면서도 "제가 법사위만 5년째인데 6차례 소위 회의, 1차례 공청회 등 하나의 법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심의한 적은 처음이다", "한 계층에 특정되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이 대상이 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 심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하며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사실상 6명의 토론 참여자 전원이 반대·기권·보류 의견을 개진했다. 국회법(106조)상 토론은 찬반 교대로 실시해야 하지만, 소속 정당을 불문하고 여야 지도부 합의에 동의하지 못한 의원들이 소신을 밝히는 장이 되면서 다소 예외적 상황이 연출됐다.

국민의힘 소속 권성동·김태흠·송석준 의원은 "(기업에 대한) 무조건적 처벌과 형량 강화", "근로자 안전이란 취지를 넘어 산업 위축, 경제생태계 파괴를 불러올 것", "기업가만 옥죄는 과잉입법", "기업 때려잡을 작정이냐" 등 재계 측 의견과 유사한 취지에서 반대 토론을 했다.

반면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는 "국민의 생명 안전을 지키기 위한 중대재해법이 첫발을 내딛는 것은 목숨을 건 단식을 한 유가족과 국민들의 성과"라며 감사를 표하면서도 "국민 70% 찬성하는 법안인데 허점투성이 법안으로 제출돼 유감이다. 이 법안에는 경영책임자 면책 조항,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 등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중대재해법이 제정되는 이 자리가 결코 웃을 수 없는 서글픈 자리가 됐다"며 울먹였다.

같은 당 류호정 의원은 "중대재해 기업 처벌을 명확히 해서 일하다 죽거나 다치는 일이 없게 하자는 정의당의 촉구와 유족의 단식은 법사위 논의 중에도 계속됐지만, 정의당과 노동자의 요구는 하나식 잘려나갔다"며 "(이는) 표결을 앞둔 지금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이 반대 토론에 나선 이유"라고 했다. 류 의원은 "'사람이 먼저다'라는 민주당 정부의 국정철학은 사라졌다. '가진 사람이 먼저다'라고 언론이 비판하고 있다"고 꼬집으며 "정의당은 (법안 표결에서) 기권한다",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열린민주당 강민경 의원도 "합의·조정 과정이 법의 근본 목적을 훼손하면 안 된다"며 "이 법은 자칫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 다시 재연될 소지가 많다"고 지적헀다. 강 의원은 "이 건물 바로 앞에서 29일째 단식하는 김용균 씨 어머님, 이한빛 PD 아버님께 박병석 국회의장, 이낙연 민주당 대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위로·약속·다짐하는 것을 봤고, 저를 포함한 의원들도 '다시는 용균이나 한빛이 같은 불행한 일이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우리 앞에 제출된 이 법으로는 결코 그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비판했다.

본회의에 앞서, 이날 오전 열린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는 전날 소위원회 심사를 마친 법률안이 그대로 의결됐다. △5인 미만 사업장은 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법 시행을 3년 유예(전체 업계도 1년 유예)하며 △재해 발생시 기업의 '경영 책임자' 대신 그 부하인 안전 담당 이사를 대신 처벌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재해 발생 원인의 인과관계 추정 조항도 삭제됐다.

법사위 회의에서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5인 미만 사업장을 통으로 배제하는 경우는 문제가 있다"며 "열악한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업종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5인 미만 사업장을 (일괄) 배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지만 그도 표결 요구까지는 하지 않았고, 결국 법안 통과는 만장일치로 이뤄졌다.

29일째 단식농성 중인 고(故)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씨 등 산업재해 유족들이 법사위 회의장을 찾아 눈물로 호소했지만 법안 처리를 막지는 못했다. 김 씨는 특히 5인 미만 사업장 제외 조항을 "절대로 유가족들은 허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다"고 항의했지만 결국 회의장 앞 복도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최대한의 사회적 합의에 따라 법안을 만들었다"(김태년 원내대표, 이날 아침회의에서)라고 자평하고 있지만 사회 각계에서는 거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양대 노총이 여야를 강하게 규탄하고 나섰다. 한국노총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쓰레기가 된 법사위 소위안을 폐기하고 실효성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며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죽어도 된다는 법, 발주처 책임을 묻지 않는 법, 책임 있는 대표이사가 '바지 이사'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법, 징벌적 벌금과 손해배상이 없는 법, 공무원 처벌도 없는 법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민주노총은 특히 여당을 겨냥해 "검찰개혁보다 더 중요한 시민 생명·안전 문제 앞에서는 '야당 동의'를 핑계로 대고 야당과 마주앉아 서로 '개악'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전날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도 "재계의 요구만 대폭 수용하며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이런 법은 있으나 마나"라며 "절규와 호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는 본회의 직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 합의안을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 법은 반쪽짜리 법"이라며 "온전하고 제대로 된 법이 되도록 개정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제정법은 △말단 관리자 처벌이 아닌 진짜 경영책임자 처벌 △특수고용노동자, 하청노동자 원청 처벌 △하한형 형사처벌 도입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등 운동본부가 법 제정의 원칙으로 밝혀 온 것들이 담겼다"고 일면 평가하면서도 "형사처벌이나 벌금이 매우 낮고 경영책임자 면책의 여지를 여전히 남겼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경제단체는 부끄러움과 죄의식도 없이 이 법이 제정되면 기업이 망할 것처럼 주장하면서 끝까지 법 제정에 반대했고, 생명과 안전을 우선 가치로 한다는 문재인 정부는 적용 대상을 줄이고 처벌을 낮추기에 급급했다. 국회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 법안의 핵심적인 취지를 훼손했다"면서 "노동자 시민의 요구에 역행하는 경제단체와 정부, 국회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다.

한편 재계와 건설업계에서는 오히려 이 법률 제정안이 경영자를 지나치게 얽죄고 '불가능한 의무'를 지운다고 주장하며 불만을 표했다.

[곽재훈 기자(nowhere@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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