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낯선 세상엔 어떤 종소리 울려퍼질까

한겨레 2021. 1. 8. 16: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메탈리카의 'For Whom The Bell Tolls'

세상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는 일은 매우 쉽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픈 이 시대의 명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 등장하는 악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지. 볼일을 보기 전에 손을 씻는 사람과 볼일을 본 뒤에 손을 씻는 사람.”

오늘 칼럼은 이렇게 시작해보자.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제야의 종 타종 행사에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 나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어떤가?

<한겨레>가 만든 동영상 콘텐츠 ‘제야의 종에 관한 쓸데 있는 티엠아이(TMI)’에 나와 있는 내용 몇가지. 새해 첫날 종을 치는 이벤트는 1929년 경성방송국에서 시작했고, 지금처럼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를 한 건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부터란다.

수많은 시민이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다. 지난해의 아쉬움을 멀어지는 종소리에 실어 보내고 올해의 희망을 이어 울리는 종소리로 맞이하기 위해. 격동의 현대사 70년 동안 한번도 빼먹은 적 없는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올해 처음으로 취소됐다. 그렇다고 오는 한해를 막을 순 없지만.

제야의 종이 새해의 희망을 위한 종이라면, 죽음을 알리는 종도 있다. 누군가 죽었을 때 교회에서 울리는 조종이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제목만은 익숙한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종이 바로 이 조종이다. 이 멋진 제목을 헤밍웨이가 지은 것으로 다들 알고 있지만, 사실 수백년 전 또 한명의 위대한 작가 ‘존 던’이라는 시인이 쓴 글의 일부에서 따온 것이다. 영문학 전공자라면 대부분 학교에서 배울 정도로 꽤나 중요한 작가인 존 던의 글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인간은 누구도 섬으로 살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인류라는 대륙의 일부이며 바다의 일부다. 흙 한줌이 파도에 씻겨나가면 유럽 대륙이 그만큼 작아지듯, 타인의 죽음은 나를 줄어들게 만든다. 그러니 묻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느냐고. 지금 들리는 조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고 있다.’

헤밍웨이가 이 글에서 일부를 딴 제목으로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한 소설을 썼고, 그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는 소설 속 한 장면을 그린 같은 제목의 노래 ‘포 훔 더 벨 톨스’를 만들었다. 두번째 음반에 실린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수천번의 공연에서 늘 빼먹지 않고 연주하는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장엄한 종소리가 울린 뒤 둔중한 베이스 연주로 시작되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요즘 많이들 쓰는 표현으로 가슴이 웅장해진다. 새해를 시작하는 겨울날 정신 바짝 들게 한번쯤 들어볼 만하다.

대학 시절 필자는 존 던의 철학을 배우며 심각한 반감을 느꼈다. 그의 글에 담겨 있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영혼의 파시즘’쯤으로 인식했다. 그때 나는 공적 개념인 도덕성과 사적 개념인 행복감은 비례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반비례에 가깝다고 믿었다. 필자가 느끼는 행복의 본질이던 ‘자유로움’이나 ‘배덕감’ 같은 감정들은 도덕과 배치되고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보였으니까. 그러나 20년쯤 더 나이 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자유라는 개념이 아이러니하게도 관계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가 없으면 부모로부터의 자유도 없고, 일터가 없으면 퇴근할 때의 해방감도 느끼지 못한다. 국가가 없으면 체제나 관습을 비웃는 통쾌함도 느낄 도리가 없다. 법과 도덕이 없으면 배덕감도 존재할 수 없다. 가장 개인적인 감정도 이럴진대 성취감, 든든함, 웃음, 연대감, 보람 등 우리가 느끼는 일반적인 행복감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 공간에서 느끼는 재미조차도 타인과의 소통에서 비롯한다. 명백히 우리는 타인 없이는 행복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껏 살아본 적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매번 새해가 그랬던 건 아니다. 대부분의 새해는 지난해와 비슷했다. 그러나 최악의 바이러스가 휩쓸어버린 세상은 너무나도 낯설게 변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신세계는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 자산은 위대해지고 노동은 약소해졌다. 인류 역사상 재난은 늘 계급 격차를 심화시켰는데 이번엔 그 속도와 폭의 차원이 다르다. 변화의 전쟁터에 쓰러진 이들이 새해의 초입부터 여럿 보인다. 남의 얘기 같은가? 나는 살아남았으니, 조종 소리가 들리면 누가 죽었는지 궁금할 뿐인가? 모든 인간이 대륙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존 던의 철학에는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지만,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고 때론 분노해야 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유례없이 비정하고 불공평한 시대의 입구에서 메탈리카의 비장한 노래를 듣는다. 그저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가난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수많은 이웃의 조종 소리가 울리기 전에 그들을 일으켜줄 방법을 고민해보자. 이제 막 시작한 2021년이 끝나갈 무렵,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함께 들뜬 목소리로 셋 둘 하나를 외치고 종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