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겨울의 은유

김민식 기자 2021. 1. 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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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식 내촌목공소 대표

호크니 ‘큰 나무’ 그림 만난 후

겨울나무 세밀하게 보기 시작

추사 제주유배는 인고의 세월

노년기‘세한도’·말년엔 ‘板殿’

엄혹한 시절은 우리 삶 벼리고

사람의 진면목 알 수 있게 해

2019년 정동 서울시립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전. 불과 1년여 전에 덕수궁길을 메우며 그렇게 큰 전시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득하다. 2013년에도 규모는 작았으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호크니전이 개최됐다. 호크니 전시회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건 화가의 명성 때문이 아니고, 또 그의 작품이 이 시대 미술 중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사실에 솔깃했던 때문도 아니다. 단지 영국 요크셔 출신 화가의 ‘나무 그림’을 쫓았다.

국내의 두 차례 전시회 때마다 미술사상 가장 큰 풍경화 ‘와터 근처의 큰 나무들(Big Trees Near Warter)’이 걸렸다. 호크니의 고향 마을 와터 동구 밖 겨울 풍경이다. 아직도 형형한 그 눈매는 세월을 잊었는가, “나무는 겨울에 제대로 보인다”고 노화가는 설명한다. 캔버스 중앙의 큰 나무 세 그루와 옆으로 뒤로 촘촘히 작은 나무들로 구성된 숲에는 잎 하나 달려 있지 않다. 겨울 풍경이다. 인생의 많은 시간, 목재를 찾아 나섰던 사람으로서 호크니의 큰 나무 그림을 만난 후 겨울나무를 보기 시작했다. 앙상한 잔가지와 건조한 둥치에서 나무의 선이 세밀하게 드러났다.

다른 겨울나무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세한도(歲寒圖)’를 전시하고 있다.(1월 31일까지) 이 험한 세월 중에 기획된 ‘세한도’ 전시에서 우리가 받는 위로의 크기는 차마 어림할 수가 없겠다. 2020년 손창근 선생이 ‘세한도’를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후 열리는 특별전이다. 소장하던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해 우리 모두의 보물로 만든 손 선생 일가의 귀한 뜻은 깊고도 깊다.

‘세한도’ 14.7m 두루마리에 추사의 그림과 글 뒤로는 조선과 중국 명사 16인의 찬문(贊文)이 덧붙어 있다. ‘세한도’는 왜 세한도이며, 가격을 책정할 수 없는 보물로 왜 우리는 받드는가. 추사의 글·그림이라 모두 ‘세한도’ 반열에 이르는 보물은 아니다. ‘세한도’는 천하의 운필을 보여주는 한국화도 아니다. 그림에 연이은 추사의 글이 ‘세한도’를 더 없는 그림으로 만들었다. ‘일 년 중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측백나무가 그대로 푸른색을 간직하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서귀포 대정으로 귀양 가서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머물던 노인을 잊지 않고 찾아온 제자 이상적을, 추사는 겨울에도 변치 않고 푸른색을 간직하는 사철나무로 비유한다. 다시 ‘세한도’의 건조한 먹선을 보자. 곤고함과 겨울의 황량함만 전하는 아무런 장식 없는 집 한 채와 비틀려 굽은 가지로 간신히 버티는 늙은 소나무를 포함해 네 그루 나무가 전부다.

추사가 인용한 겨울 푸른 나무의 출전은 2500년 전 공자의 지혜를 기록한 논어다. 젊은 날, 북경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에게 해동 제일 천재라 칭송 들었던 김정희도 제주 유배의 모진 세월을 겪은 후에야 서체가 영글었다. 노년기의 ‘세한도’, 말년에 쓴 봉은사 장서고의 현판 ‘판전(板殿)’은 추사 생애 최고의 걸작 아닌가. 내 눈 위에 누구도 없고 거침없던 경화세족(京華世族·서울의 명문가 집안) 추사는 세상 권세 잃고 늙은 후에야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송나라의 대유(大儒) 정이는 인생의 세 가지 큰 불행으로, ‘젊어 과거 급제하여 일찍이 출세하는 것, 부모 형제 가족의 배경이 대단한 것, 본인의 재능과 문장이 빼어난 것’을 들었다. 마치 12세기 정이는 훗날 조선의 추사를 예언한 듯하다.

추사의 행적은 제주도 귀양길에 거쳐 간 해남 대흥사에도 전설로 남았다. 아무리 가까운 벗 초의선사 앞이지만 세상에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 현판을 떼게 하다니…. 9년 유배 끝나고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원교의 현판을 찾아 다시 내걸게 했다고 한다. 지금 대흥사 현판 ‘대웅보전’은 추사 이전에 이미 조선 고유한 서법 동국진체(東國眞體) 완성자로 평가받던 이광사의 글씨다.

서울과 격리된 제주도 유배 생활은 방약무인 추사의 인격을 성숙시켰다. 게다가 귀신도 놀랄 만한 추사체까지. 인생의 겨울을 거쳐 추사는 다시 태어난 거다. 정이가 꼽은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을 불행한 귀양살이로 극복한 추사. 입신양명의 길에 나선 이들에게 무성한 여름과 눈부신 가을빛만 그득하지 가난한 겨울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러했던 추사가 변치 않는 사람의 의리(義理)를 겨울나무에 빗대어 그리고서 논어의 ‘세한연후(歲寒然後)’를 발문에 썼다. 추사는 겨울을 읽은 것이다. 이래서 문인화(文人畵)다.

“나무는 겨울에 제대로 보인다”는 호크니의 나무 보기와 ‘겨울이 돼서야 진정한 사람을 보았노라’는 추사의 글은 맥락이 다르지 않다. 힘든 세월이다. 아무렴, 깊은 겨울에는 풍경과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니 이 시간을 마다할 것인가. 엄혹한 시절은 우리 삶을 벼린다. 겨울 휴경기는 풍성한 여름의 초대장인 것을. 겨울 그리고 가장 추운 1월, 시인 오세영은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중략)/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이라 노래한다. 겨울 눈부신 함성은 시인만의 소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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