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성 화가가 21세기 여성 화가에게

무루 2021. 1. 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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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한 초등학교 미술 시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종이와 크레파스를 나눠주며 당근을 그려보라고 했다.

아이들 앞에 놓인 종이에는 모두 똑같이 당근 모양 점선이 그려져 있고 크레파스는 빨간색 한 가지뿐이다.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고 우리 집 당근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으니 점선과 다르게 그려도 되냐고 묻자 선생님이 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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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
사라 룬드베리 지음, 이유진 옮김,
산하 펴냄

스웨덴의 한 초등학교 미술 시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종이와 크레파스를 나눠주며 당근을 그려보라고 했다. 아이들 앞에 놓인 종이에는 모두 똑같이 당근 모양 점선이 그려져 있고 크레파스는 빨간색 한 가지뿐이다. 한 여자아이가 손을 들고 우리 집 당근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으니 점선과 다르게 그려도 되냐고 묻자 선생님이 엄하게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그려라.” 요즘 같으면 이런 억압적이고 획일화된 수업 방식이 환영받기 어렵겠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흔한 교실 풍경이었다. ​

당근을 그리는 일만 그랬을까. 20세기 초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일에 정답이 강요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농부의 둘째 딸로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스스로 자기 삶을 그려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특별한 개인적 불행도 아니었을 테고. 그럼에도 어린 베타 한손은 그날 교실에서 용감하게 손을 들었고,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화가가 되고도 싶었고, 훗날 진짜로 될 것이지만 당장은 누구에게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으므로 그저 높은 나무 위를 자주 오르고 집 앞 개울 바닥의 진흙으로 부지런히 작은 새를 빚었다.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는 사라 룬드베리가 화가 베타 한손의 일기를 바탕으로 썼다. 화가의 유년기는 스웨덴이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던 1919년에 걸쳐 있었으나 여전히 여자에게 예술은 사치로 여겨졌고, 어린 베타 역시 매일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아빠가 예술가는 ‘진짜 직업’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화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베타 한손이 아주 오랫동안 하게 될 긴 싸움의 시작으로, 싸움의 상대는 여성학자 정희진이 추천사에서 썼듯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가 요구하는 나’와 싸워야만 하니까.

꿈과 삶 정성껏 돌보며 늙은 선배들

베타 한손이 화가로 살았던 삶은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한 세기를 지나 다음 세대의 목소리를 통해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것은 21세기의 여성 화가가 20세기의 여성 화가에게 전하는 사랑이다. 사라 룬드베리가 베타 한손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비단 어린 베타가 마침내 화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꿈을 이룬 뒤에도 그가 여전히 살아남아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20세기의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불꽃처럼 타올랐다가 빠르게 스러져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에도 빛나는 작품들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보고 싶다. 오래오래 살아남아 웃고 있는 할머니들의 얼굴을. 좌절의 시기와 시시한 날들도 모두 견뎌 여든이 되어서도 쓰고, 아흔이 되어서도 그리는 주름진 손들을. 때로 넘어지고 뒷걸음질치더라도 끝내 자신의 꿈과 함께 삶도 정성껏 돌보며 나이 들어간 여자들을. 다음 세대를 향해, 스스로를 해치거나 파멸시키지 않고도 자기 자신과 잘 싸워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선배들을 말이다.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저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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