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란 무엇인가 기준을 다시 세울 때

김현주 2021. 1. 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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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지 그림

서른 몇 살의 어느 새벽,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죽을 것 같아서 하던 일을 멈추었다. 사나흘을 거의 못 잔 상태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다. 어린아이 둘을 기르며 병원 일에 학업까지 병행하려 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논문을 완료하고 대학병원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기는 매한가지였다. 물에 젖은 솜 같은 몸으로 퇴근하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눈을 붙였다가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일상의 반복. 마흔 살이 되기 전에 과로 관련 질환으로 몇 번인가 병원 신세를 졌다. 과로와 건강에 대해 연구하게 된 배경 중 하나다.

그 시절 이른 새벽 출장검진을 하러 가면 심야노동을 마치고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검진을 받으려고 줄을 선 노동자들을 만나곤 했다. 무섭게 높아진 그들의 혈압을 보면서 가슴을 졸였다. 2011년, 유성기업이 파업을 했다. 주간 연속 2교대 제도를 시행하자는 노사 합의가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 회사에서 야간노동이 원인인 과로사로 한 해 한 명꼴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랐다. 마침 나는 고용노동부에서 발주한 ‘연장 야간 휴일근로 등 과중업무 수행 근로자 관리 방안’이란 연구과제를 수행 중이었다. 우리 연구는 과로가 작업장 사고, 뇌심혈관 질환, 우울증, 수면장애, 유방암, 위궤양 등을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과로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과로의 유형으로 장시간 노동과 야간노동을 제시했다. 또한 장시간 노동을 주당 52시간 이상의 근무로, 야간작업은 밤 10시에서 오전 6시 사이의 시간대에 일주일 동안 15시간 근무하는 경우로 정의했다.

그 뒤로도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회에서 뇌심혈관 질환에 대한 판정을 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2013년 나온 노동부 고시의 만성과로 인정 기준은 노동시간만을 산업재해 주요 인정 기준으로 삼아왔다. ‘뇌심혈관계 질병은 발병 전 12주 동안 주당 평균 60시간, 4주 동안 주당 평균 64시간 초과’가 기준이었다. 2018년에야 노동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교대근무 △휴일 부족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에 ‘복합적으로 노출’됐다면 산재의 ‘업무 관련성’이 커진다는 내용을 반영하여 만성과로 기준을 개정했다.

중년 여성층에서 뇌졸중이 왜 흔할까

그렇지만 과로를 노동시간의 길이로만 바라보고 기계적으로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단하는 경향은 아직도 만연하다. 특히 일·가정 양립을 위해 40시간 미만의 노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한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엔 과로를 인정받기가 더욱 어렵다. 흡연, 음주, 비만 등의 개인적 위험요인도 거의 없는 40~50대의 중년 여성층에서 뇌졸중은 흔한 질병이 아니다. 중년의 한 여성 급식노동자는 근무시간 내내 고온 환경에서 일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도 과로로 인정되지 않았다. 관제 업무를 하던 다른 여성 노동자는 주로 야간에 일하면서 수면장애를 겪었고 부서 전환을 두 번이나 요청할 정도로 직무 스트레스가 심했는데도, 근무시간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산재가 인정되지 않았다. 수면장애는 뇌졸중의 위험요인이다. 그녀는 야간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수면장애를 앓은 적이 없었고 매년 받던 야간작업 특수건강진단에서 수면장애가 악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질병판정위원회의 불승인 사유를 읽어보면 “고용노동부 고시에서 정한 기준을 충족하지 않아 만성적으로 과중한 업무 부담 요인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을 종합하여 신청 상병과 업무 간 상당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아니한다”라는 문구만 반복된다. 지난날 과로를 협소하게 정의한 연구보고서를 낸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제 과로란 무엇인지 현실에 맞는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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