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생명체'들 존재 이유를 배울 차례 [책과 삶]

배문규 기자 2021. 1. 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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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굉장한 것들의 세계
매슈 D 러플랜트 지음·하윤숙 옮김
북트리거 | 524쪽 | 2만2000원

이 동물을 멸종시킬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끓는 물에 넣어도 끄덕없다. 절대영도(약 -273.15도)로 얼려도 아무 상관없다.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려도 괜찮다. 비상식량 수준으로 건조해도 다시 물만 주면 된다. 몇십 년 동안 냉동해도 생존할 수 있다. 이 경우 ‘탈수 가사 상태’라는 1~3% 정도의 수분만 지닌 채 반(半)생명 형태로 버틴다고 한다. 태양이 적색거성으로 부풀어 올라 지구를 삼켜버리는 것 말고는 없앨 방법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가장 큰 것도 1.5㎜밖에 되지 않는 ‘완보동물(곰벌레)’ 얘기다. 반투명한 피부에 뭉툭한 여덟 개의 다리, 발톱이 나 있는 발, 퉁퉁 부은 얼굴에 토실토실한 주름. 영화 <스타워즈>에 나올 법한 못생겼으면서 어쩐지 귀여워보이는 완보동물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진지한 연구 주제는 못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구자들은 이 동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강인함’에서 인간들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깨달은 것이다.

강인함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힘을 기준으로 할 수 있고, 살상 능력을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강인함의 기본적 정의, 역경의 상황에서도 버틸 정도로 강하다는 의미를 기준으로 한다면 완보동물은 세계 최강이라고 주장할 만하다. 지난 5억년 동안 완보동물은 유성우가 쏟아지던 대변동의 시기에도, 빙하기에도, 수많은 동물들의 절멸기에도 꿋꿋하게 버텨왔다. 무엇이 ‘강한’ 것인가. ‘가장’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갈 데까지 간 생존력. 완보동물 무리 중 가장 강인한 것으로 꼽히는 ‘라마조티우스 바리에오르나투스’를 전자현미경으로 본 모습. 가즈하루 아라카와·히로키 히가시야마
5억년을 잘 버텨온 완보동물
살 만큼 먹고 움직인 나무늘보
절대 암에 걸리지 않는 코끼리
극한의 진화로 강인한 존재들
‘자연 보존 사절단’으로 정의
인류 생존을 위한 성찰 제안

<굉장한 것들의 세계>는 가장 큰 생물, 가장 작은 생물, 가장 오래 사는 생물, 가장 빠른 생물, 가장 시끄러운 생물, 가장 강인한 생물, 가장 치명적인 생물, 가장 똑똑한 생물 등 ‘갈 데까지 간’ 생명체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저널리스트 출신 저자의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쓰인 책은 잘 짜인 다큐멘터리 시리즈처럼 흥미진진하다. 극한의 진화를 이룬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기준과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까지 확장된다.

책에선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거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생물들의 ‘굉장한’ 면을 파헤쳐간다. 이를테면 “나무늘보에게는 아무 결함도 없다”. 저자는 아마존 정글로 직접 나무늘보를 만나러 간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 며칠 뒤 나무늘보 한 마리가 뭔가를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다. 거센 바람이 불자 아래쪽 나뭇가지로 이동한 것이다. 1.8m를 움직이는데 60초 조금 안 되게 걸려 시속 96m 정도로 관찰됐다. 그마저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듯 나름 빠르게 움직인 결과였다. 아나콘다, 재규어 등 온갖 육식동물이 우글거리는 중남미 숲에서 나무늘보는 어떻게 생존해 왔을까. 수많은 동물들을 절멸시킨 환경변화를 수천만년 동안 견디면서 말이다. 동물학자 루시 쿡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무늘보는 사실은 매우 성공적인 동물이다. 열대 정글에서 나무늘보는 포유류 생물량의 거의 3분의 2를 이루는데, 이는 ‘난 상당히 잘 지내고 있어요, 고마워요’라고 생물학이 대신 말해 주는 것이다.”

‘나무늘보’의 느린 속도는 오히려 강인한 적응력을 보여준다. ‘코끼리’는 악성 돌연변이에 대응하는 P53 유전자가 많아 암에 걸리지 않는다. 우라늄 오염 지역인 미국 콜로라도주 라이플에서 발견된 ‘베타프로테오박테리아’는 방사능을 제거해 주목받았다. 북미사시나무 군집 ‘판도’는 세계 최대의 생명체로 추정된다. 초소형 개구리 ‘파이도프리네 아마우엔시스’는 크기가 7.7㎜ 정도다. ‘가지뿔영양’은 최고 시속 88㎞로 치타보다는 조금 느리지만 훨씬 오래 달릴 수 있다. ‘강털소나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므두셀라는 4850살이다(왼쪽 위 사진부터). 위키피디아

관점을 바꿔야 한다. 나무늘보는 잎을 주로 먹는다. 영양 측면에서 결코 좋지는 않다. 하지만 연구자들이 나무늘보의 대사율을 측정해보니 하루에 약 100㎉를 연소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땅콩버터 한 테이블스푼 정도다. 이제껏 알려진 포유류 가운데 가장 낮은 대사율을 보인다는 의미다. 또한 대다수 동물은 먹이를 찾으러 평생을 보내지만, 나무에 매달려 사는 나무늘보는 주변이 온통 먹이로 둘러싸여 있다.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다보니 나무늘보들은 더 많은 나무늘보를 만드는 번식에 집중할 수 있다. “나무늘보가 생존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줄 교훈은 무엇일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차분하게 열을 식히고 조금은 느긋해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교훈은, 식량 안보에 관한 부분이다. 나무늘보는 주변에서 곧바로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먹도록 진화했다.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진화했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이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사람들이 최고 기록과 기네스북에 집착하는 데서 보듯 극단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이상치(outlier)’라 할 수 있다. 극한의 존재들이 열외로 취급받은 이유다. 하지만 멸종위기 동식물에 대한 연구와 보존 활동이 늘면서 최상위 생명체의 존재가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독특한 유전적 형질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생명 연장, 극한 속도, 질병 치료의 비밀이 눈앞에 있던 것이다. “자연 세계에서 보이는 가장 극단의 현상은 우리의 한계를 알기 위한 관점을 제공한다. 아울러 우리의 잠재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육상동물인 코끼리는 몸집 크기대로라면 발암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그 법칙을 거슬러 절대 암에 걸리지 않는다. 눈에 뵈지도 않는 베타프로테오박테리아(임질·수막염을 유발하는 세균)는 방사성 우라늄을 호흡하고 ‘환원’이라는 과정을 통해 방사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옥을 탈출하려다 붙잡힌 것처럼 생긴 강털소나무는 4000년 넘게 살면서도 거의 늙지 않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미국 대초원을 뛰어다니는 가지뿔영양은 수백m를 달리면 지치는 치타와 달리 그와 비슷한 속도로 수㎞를 달릴 수 있는 최고의 달리기 선수다. 고환이 작을수록 고함을 크게 지르는 고함원숭이에게서는 성욕에 대한 기발한 발견을 하기도 한다. 성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짝짓기 상대의 관심을 더욱 열심히 끌려고 하는 것이다. 암 유발자이면서 암에 맞설 무기가 될 수도 있는 담뱃잎, ‘지능’을 인간보다 4억년 먼저 가진 문어 등 놀라운 생물들의 세계가 소개된다.

책에선 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생각거리를 던진다. 미국 유타주 중부 피시호 남쪽에는 ‘판도’라는 사시나무가 산다. 그 군집의 둘레는 43만㎡.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숲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나무인 것이다. 군락은 4만7000여개 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유전자가 동일하며 땅속에서 뿌리로 이어져있다. 이제껏 알려진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로 추정된다. 거대한 크기 때문에 자연의 경이로서 관심을 받던 이 사시나무 군락은 최근 학문적 흥미를 끌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광범위한 가뭄으로 미국 서부 지역 몇몇 곳에서 5분의 1이나 되는 사시나무가 죽고, 이들 사시나무 군집 덕분에 유지되던 생물다양성이 유례없이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사시나무가 잘 자라는 조건을 알기 위해, 가장 번성했던 사시나무의 존재가 주목받은 것이다.

책에선 묻는다. 지구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회복력이 뛰어나며 진화상으로 가장 변화가 없는 생물들도 인간의 파괴적 활동의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냐고, 우리 행동이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동물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면 우리 자신에게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상상해 보라고 말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굉장한 존재들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많은 생명체는 그저 놀라서 입을 벌리고 바라볼 대상만은 아니다. 이들은 자연 보존을 알리는 사절단이다. 우리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어주는 단서들이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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