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다시 일어나고파".. 그의 '펜'은 암보다 강하다

장재선 기자 2021. 1. 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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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프다.

이번 전시는 그의 문화재 펜화 작업을 높게 평가해 온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이 후원한다.

그는 이후 하루 종일 펜화만 그리는 생활을 수년간 지속하며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김영택 류(流)' 펜화에 대한 자부심이 큰 그는 문화재와 자연을 그림으로 옮길 때 자신의 사념을 배제하려 애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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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화백이 펜화로 복원한 프랑스 노르망디 몽생미셸수도원(위)과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김영택 화백이 평소에 자주 찾는 전남 해남 미황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쓰다듬고 있다. 김녕만 사진작가 촬영

- 대장암 투병중에도 개인전 여는 김영택 화백

화업 30년 결산의 의미

몽생수도원·콜로세움 등

펜화 대표작 40점 선봬

“미술관 건립 간절한 소망

생전에 꼭 지어졌으면…”

그가 아프다. 대장암이 재발해 말기가 된 탓이다. 위장 장애로 식사를 못 하고 영양 주사로 버티고 있다.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그런 그가 오는 20일부터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펜화 개인전을 연다. 2월 15일까지 진행하는 전시는 그의 화업 30년을 결산하는 의미가 있다. 서양의 기록펜화를 한국에서 새롭게 재창조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영택(75) 화백 이야기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화가로서 제 일을 하겠습니다. 아직 제 눈이 살아 있다고 하니 의지의 사나이라는 별명답게 다시 일어나고 싶습니다.”

김 화백은 최근 SNS와 전화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다. 다시 건강을 되찾으면 서울 중심가의 현재 모습과 풍물을 대형화면(0.6×12m)에 담아 문화재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 그려온 펜화 대표작 40점을 선보인다. 로마 콜로세움, 노르망디 몽생미셸 수도원, 이스탄불 아야소피아 박물관, 오사카(大阪)성 천수각, 베이징(北京) 천단 기년전 등 해외 문화재 30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전차가 다니기 전의 돈의문, 19세 말엽의 흥인지문, 독립문을 세우면서 기둥만 남기고 문루가 철거된 영은문 등 우리 문화재를 담은 복원화 10점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그의 문화재 펜화 작업을 높게 평가해 온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이 후원한다. 김 화백의 고향인 인천시도 함께 나섰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문화재단에서는 4000만 원이 넘는 대관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수익금 전액을 작가에게 지급하는 이례적인 특별전을 여는 것입니다. 투병하는 작가를 안타깝게 여긴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의 제안을 이호재 가나문화재단 이사장께서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김 화백의 전언을 들은 후 김 이사장에게 확인하니 “우리 시대의 훌륭한 작가가 병으로 몸이 극도로 여윈 것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 격려해드리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답이 돌아왔다.

김 화백은 0.05㎜의 예술로 불리는 펜화를 독학으로 개척해왔다. 그는 홍익대에서 공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산업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쳤다.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상표센터(ITC)로부터 ‘디자인 앰배서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펜화가로 진로를 바꾼 것은, 1990년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귀스타브 도레의 펜화를 본 후였다. 이전부터 광고 디자인을 하며 펜화기법을 시도한 적이 있던 그는 ‘나만의 창조적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내면에서 끓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후 하루 종일 펜화만 그리는 생활을 수년간 지속하며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세계 각국 문화재의 건축 미학을 초정밀 펜화로 복원해내는 그의 작업은 미술계 안팎에서 점점 인정받았다.

“세밀한 기록펜화는 서양에서 인쇄술과 함께 발전했는데, 19세기에 카메라가 나오며 완전히 소멸했지요. 저는 이를 눈여겨보고 기록수단으로서의 펜화를 예술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시도했습니다.”

‘김영택 류(流)’ 펜화에 대한 자부심이 큰 그는 문화재와 자연을 그림으로 옮길 때 자신의 사념을 배제하려 애쓴다고 했다. 사물의 기와 특성을 살려 그 진면모를 드러내려면 작가가 기교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화선일체(畵禪一體)의 상태에 이르러야 합니다. 작가의 생활도 그에 맞춰야지요. 제가 해남 미황사 등에서 절 생활을 많이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는 세속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으려 하지만, 펜화 미술관 건립은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오랫동안 관련 그림과 자료를 수집해왔습니다. 지방자치단체 등과 논의하고 있는데, 제 생전에 꼭 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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