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여행 준비로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

김선식 2021. 1. 8. 08: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장소, 지도에 '별' 찍고 가이드북 펼쳐
서른 즈음에 알아버린 지독한 취미생활 여전해
<여행준비의 기술> 지은이 박재영 인터뷰
일본 나오시마의 대표 조형물 `빨간 호박' 안에 들어간 박 작가. 그는 다시 가고 싶은 곳 중 하나로 나오시마를 꼽았다. 사진 박재영 제공
세상의 끝 분위기가 나는 미국 플로리다 키웨스트. 사진 박재영 제공
스페인 고속도로의 귀여운 표지판. 사진 박재영 제공
박재영 작가는 여행 기념 자석을 사거나 직접 만들어 집 안 벽 한쪽을 '자석 갤러리'로 꾸몄다. 사진 박재영 제공
지난해 12월28일 서울 마포구 <청년의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영 작가.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제공

“여행이 즐거운 건 여행이 곧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는!” 지난해 가을 타이에 동행한 승우여행사 이원근(44) 대표가 말했다. 그 얘길 출장 마지막 날 들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지막 날도 아닌데 일상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할 뻔했다. ‘여행 준비’가 취미인 사람은 어떨까. 지난해 11월 <여행준비의 기술>을 펴낸 박재영(50) 작가는 “마지막 날은 당연히 아쉽지만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책 집필 배경을 이렇게 썼다. ‘언제 갈지 기약도 없고 결국 못 가지 싶은 낯선 곳의 지도도 열심히 들여다봤건만, 전 세계의 국경들이 사실상 폐쇄되는 상황에 놓이니, 모든 게 시들해졌다.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취미는 여행 준비이지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지난해 12월28일 서울 마포구 <청년의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영 작가는 “그냥 웃자고 쓴 책”이라고 말했다.

박재영 작가는 취미만큼이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 인턴 1년, 공중보건의 3년 생활을 마쳤다. 그 뒤 바로 온라인 매체 <청년의사> 편집국장(1999~2011년)에 이어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팟캐스트·유튜브 ‘나는 의사다’, 팟캐스트·네이버 오디오 클립 ‘yg와 jyp의 책걸상’ 프로듀서 겸 진행자이기도 하다.

―의사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정신과 레지던트를 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의료 전문 매체 <청년의사>가 본격적으로 언론사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상근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의학을 공부한 저널리스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의사와 환자는 가까워야 하는 관계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 그 가교 구실을 하고 싶었다.

덴마크의 새 명물 포레스트 타워에 올라 아래를 찍은 사진. 사진 박재영 제공

그는 작가다. 현재까지 책 8권을 썼다. 1994년, 2008년 방영된 드라마 <종합병원>(MBC) 두 편의 원작인 <종합병원 청년의사들>(공저)과 <종합병원 2.0>을 펴냈다. 1999년엔 요리 에세이도 썼다. “음식에 관심 많고 미각이 예민한 편”인 그는 “평생 전업주부로 산 어머니께 추억을 만들어드릴 겸” “1년간 집중적으로” 작업해 어머니의 레시피 152개와 그의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냈다. 하지만 그는 대표작으론 2013년에 낸 <개념의료>를 꼽는다. 시민, 의사들에게 국내 의료 시스템 역사와 실상을 알리려고 쓴 책이다. 그는 “다른 책에 비해 압도적으로 공을 들인 책”이라며 “아마도 평생 가장 보람찬 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7년 만에 때아닌 ‘여행 준비’를 주제로 책을 낸 이유는?

“약 10년 전부터 쓰려고 했다. 제목까지 정한 책이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여행 못 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여행 준비 책을 쓰고 싶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내 여행담보다 여행 준비 이야기를 즐거워했다. 그들이 ‘재밌는 책이 될 것’이라며 부추겼다.”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등대. 사진 박재영 제공

―나이 서른에야 취미가 ‘여행 준비’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학창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선생님들이 그랬다. ‘독서가 취미라고 하지 마라. 독서는 생활이다.’ 좀 억울했다. 서른살 즈음 누군가 또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불현듯 내가 ‘여행 준비’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10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애독 잡지 <월간 시각표>(기차, 고속·시외버스, 여객선, 비행기 출발·도착 정보와 가격 등 정보를 제공하는 책)를 읽었고 누나의 교과서 ‘사회과 부도’를 누나보다 많이 봤다. 여행 가이드북과 지도책을 사 보곤 했다. 맘에 꽂히는 곳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이고 형광펜으로 칠했다.”

요즘 박재영 작가는 매일 수시로 ‘별’을 찍는다.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 구글 지도에 찍는 별(특정 장소를 기억할 목적으로 인터넷 지도 위에 별 모양을 표시하는 기능)이다. 그의 구글 지도엔 천개가 넘는 별이 반짝이고 있다.

―가장 최근 ‘별’ 찍은 장소 중 기억나는 곳은?

“지난주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를 읽다가 ‘별’을 찍었다. 덴마크 북부 해안 도시 스카겐에 있는 한 교회다. 소설은 해풍에 밀려온 모래에 파묻혀 첨탑만 남은 그 교회를 길게 묘사했다. 찾아보니 실제 지명이었고, 예전 덴마크 여행을 준비할 때 ‘별’을 찍어 둔 곳이었다. 짜릿하고 기뻤다.(웃음) 또 한 곳 ‘별’을 찍은 곳은 캐나다 퀘벡주 남부 소도시 ‘셋포드마인즈’다. 소설에서 석면 광산으로 한때 번성했다가 쇠락한 지역으로 나오는데 실제 있는 도시다. 그쪽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들러 볼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표시했다. 외국 소설은 실제 지명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권 볼 때마다 ‘별’ 한두 개씩은 찍는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