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친환경페인트라더니..현대중 노동자 '집단 피부병'

이효상 기자 입력 2021. 1. 8. 06:01 수정 2021. 1. 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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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피하려 도입한 도료 탓
직업병에도 비정규직만 퇴사

[경향신문]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도장공장 작업자들에게는 지난해 5월부터 집단 피부병이 나타났다. 손과 팔에서 시작된 붉은 반점은 가슴과 복부, 다리까지 번졌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제공

현대중공업 계열 조선소에서 선박에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자들에게 지난해 피부병이 집단 발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대기환경보전법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회사가 ‘친환경 페인트’라며 도입한 일부 무용제 도료가 원인인 것으로 파악됐다. 사측은 직업병 소견을 받은 정규직 노동자를 전환 배치했으나 사내 하청노동자는 같은 직업병 소견을 받고도 회사를 떠나야 했다. 직업병 발병과 사후처리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발생한 것이다.

현대중공업 노사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울산대병원은 피부병 증상이 비교적 심한 작업자 13명의 건강진단을 실시한 결과 A씨 등 9명이 직업성 질병 가능성을 보였다고 사측에 통보했다. ‘직업병 유소견자(D1)’가 5명이었고, ‘직업병으로 진전될 우려가 있어 추후 관찰이 필요한 작업자(C1)’가 4명이었다. 지난 연말 증상을 보이지 않은 작업자 300여명에 대한 건강진단에서도 피부질환 3명을 포함해 32명이 C1 판단을 받았다.

지난해 4월 선박용 페인트로 사용하기 위해 도입한 무용제 도료가 피부 발진의 원인이었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는 지난해 5월부터 피부 발진자가 나오기 시작해 10월 중순까지 24명이 확인됐다. 9월부터 같은 무용제 도료를 사용한 계열사 현대삼호중공업 목포조선소에서는 11월까지 27명에게서 피부병이 나타났다. 지방고용노동청 지시로 10월 건강진단이 이뤄진 현대중공업과 달리 삼호중공업은 노동청이 개입하지 않으며 건강진단은 12월에야 실시됐다. 노조가 확인한 피부병 발병자 90%(45명)는 하청노동자였다.

현대중공업그룹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피부 발진 원인으로 추정되는 제품은 전량 회수 및 단종 처리했다”며 “현재 피부 발진 증상이 있는 인원은 없다”고 밝혔다.

■검증 안 된 제품에 무방비 노출…발병자 90%는 하청노동자

현대중 피부병 집단 발병

오존 발생 물질 함량 낮은
신제품 ‘테스트’하듯 사용
8월 피부병 연관성 의심하고
11월에야 교체 계획 ‘늑장’
하청노동자 사후관리도 차별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도장공장에서 17년을 일한 석지훈씨(45)에게 피부 발진이 처음 나타난 것은 지난해 7월이다. 양 손과 팔에 나타나기 시작한 붉은 반점은 그다음 달 가슴과 복부, 어깨까지 번졌고 9월에는 온몸을 덮었다. 상체로 퍼지기 시작한 후로는 가려움증에 몸을 긁다 새벽 5~6시가 되어야 겨우 잠들었다. 동네 피부과를 찾아가도 원인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컸다.

지난해 8월 중순 피부 질환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회사 관계자와 무용제 도료의 제조사인 KCC 관계자가 석씨를 찾아왔다. “이 정도면 다른 부서를 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의아하게 생각한 석씨는 그 길로 현장을 다니며 비슷한 증상이 있는 작업자를 찾기 시작했다. 오전·오후 쉬는 시간 20분 동안 석씨 혼자 15명의 피부 발진자를 찾았다. 빠르면 5월부터 발병한 사람도 있었다. 그 뒤로도 10월 중순까지 작업자의 발병은 이어졌다.

지난해 4월 회사가 선박용 페인트로 사용하기 위해 도입한 무용제 도료가 피부 발진의 원인이었다. 기존에는 페인트를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해 시너 등 유기용제를 사용했는데, 이 경우 대기 중에 오존을 발생시키는 휘발성유기화합물(VOCs)이 배출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VOCs 함량이 낮은 친환경 무용제 도료가 개발됐는데, 작업자에게는 피부 발진을 일으킨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늑장 대처가 피해를 키웠다. KCC 관계자가 8월 중순 방문했다는 건 회사도 그때쯤 피부병과 무용제 도료의 연관성을 의심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회사는 좀처럼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노조는 9월 말부터 회사에 무용제 도료 사용 중단을, 울산고용노동청에 임시건강진단을 각각 요청했다. 10월 중순 노동청이 건강진단을 명령하고 노사 회의를 수차례 거친 후에야 회사는 움직였다. 회사는 11월6일 사보를 통해 “피부 발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은 특정 성분을 확인했다”며 도료 교체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그사이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에는 9월부터 KCC의 무용제 도료가 공급돼 3개월간 27명의 피부 질환자가 나왔다. 노조는 “개발품 테스트를 우리한테 하고 있다”며 “검증되지 않은 유해성 무용제 도료 제품을 무방비 상태에서 노동자에게 작업시켜 발생한 심각한 화학사고”라고 했다.

정부가 규제를 완화한 탓도 있다. 당초 정부는 VOCs 배출을 감축하기 위해 조선소 도장공장에 VOCs 저감시설을 설치토록 했다. 하지만 2019년 말 저감시설 구축에 따른 비용 부담을 우려한 조선업계 요청으로 VOCs 함량이 적은 도료, 이른바 무용제 도료 사용 시 저감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제를 완화했다. 이에 조선업계가 충분히 안전성 검토를 거치지 않은 무용제 도료 사용을 확대한 것이다.

피부 발진이 나타난 작업자의 90%는 하청노동자다. 야근이 많아 페인트에 더 많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사후관리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은 차별을 받았다. 정규직인 석지훈씨는 직업병 유소견자로 분류돼 근로금지 권고를 받고 다른 부서로 재배치됐다. 반면 일부 하청노동자는 같은 판단을 받고도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하청업체의 경우 작업전환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석씨는 “현재 다른 제조사의 무용제 도료가 입고됐는데 하청노동자 위주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며 “하청노동자는 직업병 판정을 받더라도 보호를 못 받는데 앞으로는 피부병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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