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삶과 문학을 찾아서

최재봉 2021. 1.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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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겪은 일화와 꼼꼼한 조사 바탕
후배 시인 이기철이 쓴 '김춘수의 풍경' 나와

김춘수의 풍경이기철 지음/문학사상·1만5000원

김춘수(1922~2004)는 시에서 관념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언어 자체의 물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무의미 시’를 주창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시 ‘꽃’은 존재의 인식과 의미 생성을 향한 열망을 한껏 뿜어낸다. 그는 역사와 민중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았고, 전두환의 5공화국 당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거쳐 방송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전두환의 대통령 퇴임식 축시를 썼다. 그러나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과 어울리다가 불령선인으로 찍혀 구속되었으며 결국 퇴학을 당하고 추방되었던 이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이율배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김춘수 시인. <한겨레> 자료사진

<김춘수의 풍경>은 그를 오래도록 가까이에서 지켜본 후배 시인 이기철(영남대 명예교수)이 들려주는 인간 김춘수와 시인 김춘수의 관찰기다. 대상이 되는 이의 삶과 문학을 아울렀다는 점에서 문학적 평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생애를 시시콜콜 늘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시인의 인간과 문학을 내가 알고 있는 한 사실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며 어떤 숨김도, 어떤 과장도, 어떤 비하도, 어떤 미화도 첨가하지 않으려 한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이기철 시인이 김춘수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경북대 주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모집에 당선되었을 때였다. 당시 심사위원이 이 학교 교수였던 김춘수 시인이었다. 1979년 김춘수가 영남대로 옮겨 왔을 때 이기철 시인은 그의 연구실에서 1년 반쯤 무급 조교로 일했다. 1981년에는 김춘수가 국회의원으로 가게 되면서 자리가 빈 교수직을 당시 마산대(현 창원대) 교수였던 이기철이 이어받았는데, 학기중이라서 완강하게 반대하던 마산대 총장에게 ‘국회 문공위원 김춘수’ 명의로 쓴 편지가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 이 책 <김춘수의 풍경> 앞쪽에는 1998년 이기철 시인이 시와시학상을 받을 때 시상자였던 김춘수 시인한테서 상패를 받는 사진도 실려 있다. 공식적인 자리 말고도 이기철 시인은 자주 김춘수 시인을 방문하거나 사석에서 어울렸다. 그런 자리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도 책에는 풍성하다.

김춘수의 언어 실험이 본격화한 ‘처용단장’ 연작에서 현실과 자연은 본래의 실체와 맥락에서 벗어나 시라는 인공 구조물 속 한갓 소리와 이미지로 동원될 따름이다. 여느 독자들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의 연쇄 속에서도 유년의 바다 이미지가 줄기차게 나타난다는 사실만은 도드라진다. “바다가 왼종일/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입에 바람개비를 물고 한 아이가/ 비 개인 해안통을 달리고 있었다.”, “내 손바닥에 고인 바다/ 그때의 어리디 어린 바다는 밤이었다.” 등등. 경남 통영 부둣가의 우물 딸린 집에서 태어나 자란 김춘수의 유년기 추억이 그를 평생 따라다녔던 것이라고 이기철 시인은 이해한다.

“南天(남천)과 南天 사이 여름이 와서/ 붕어가 알을 깐다./ 南天은 막 지고/ 내년 봄까지/ 눈이 아마 두 번은 내릴 거야 내릴 거야.”(김춘수, ‘남천’ 전문)

이 시가 발표된 뒤 어느 중견 평론가가 작품 제목 ‘남천’은 사람이 죽은 뒤 가는, 도솔천 아래 명부를 뜻한다고 신문 월평에 썼고 그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시는 김춘수의 무의미 시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기철 시인이 어느 날 김춘수를 찾아가 그의 집 거실에서 들은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남천’은 김춘수의 집 마당귀에 심겨진 관목이라는 것. 남천을 그렇게 식물 이름으로 이해하고 보면, 이 시는 전혀 난해하지 않게 읽힌다.

이기철 시인. 이기철 제공

수십 번 김춘수의 집에 드나든 이기철 시인도 그의 서재를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김춘수 시인이 “자신의 독서 체험을 은폐”하느라 일부러 서재에 들이지 않은 것이라고 그는 짐작한다. “김춘수 시인은 스스로가 베일에 싸여 있기를 좋아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춘수 시인은 남이 보는 데서는 절대로 메모를 하지 않았다.” 만석꾼 집안의 장손으로 유복하게 성장했지만, 그는 돈에 관한 한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 시인의 곁에서 시인의 면면을 지켜보았지만 그가 남을 위해 지갑을 연다거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계산하는 일을 본 적이 없다.” 1990년대의 어느 가을날, 시인 단체 행사로 서울에서 전주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일곱 시간 동안 김춘수 시인이 옆자리의 이기철 시인에게 한 말 중 “가장 많이 언급된 이야기는 돈이었다.” 전두환 5공화국에 ‘부역’한 것이 본의가 아니었다는 입장을 견지했던 김춘수가 1994년 서울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자신의 국회의원 경력을 두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며 반성과 속죄의 말을 한 적이 있다는 증언도 흥미롭다.

‘언어의 절약’으로 시작해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나아가고 종내에는 ‘무의미 시’로 귀결된 김춘수의 언어 실험이 일단락되고 결국 서정시로 회귀하게 된 계기가 1999년 부인의 죽음이었다고 이기철 시인은 파악한다. 2002년에 낸 시집 <쉰한 편의 비가>는 사별한 부인을 향한 그리움으로 한껏 출렁인다.

“여보, 하는 소리에는/ 서열이 없다./ 서열보다 더 그윽한/ 구배(=기울기)가 있다./ (…) / 여보, 하는 그 소리/ 그 소리 들으면 어디서/ 낯선 천사 한 분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제1번 비가’ 부분)

“내 살이 네 살에 닿고 싶어 한다./ 나는 시방 그런 수렁에 빠져 있다./ 수렁은 밑도 끝도 없다.”(‘제28번 비가’ 부분)

<김춘수의 풍경>에서는 이밖에도 습작기 동인 활동과 불확실한 등단작,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서정주 등 영향을 준 시인들, 동향 출신인 청마 유치환과의 관계, 후기 시들에 보이는 초기 시의 자기 표절 등에 관한 꼼꼼한 조사와 객관적인 서술을 만날 수 있다. 고인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없는 시인의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책머리에’) 적어 나간 기록이 값지고 반갑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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