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고향' 크레타에서 유럽 문명이 시작됐다

한겨레 2021. 1. 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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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⑮크레타섬의 역사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나고 자란 '거대한 요람' 크레타섬
서구 문명의 근간이라 여겨지는 미노아문명이 탄생한 곳
크레타섬의 대표 유적인 크노소스 궁전. 김헌 제공

로도스에서 출발한 크루즈는 밤새 ‘바다를 쟁기질하며’ 크레타로 향했다. 이 항로는 오래전부터 그쪽 사람들이 애용하던 것이었다. 특히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나아갈 때,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가다 로도스섬을 거점으로 삼아,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여러 섬들을 거쳐 크레타로 갔다. 기독교를 전파하던 바울이 이스라엘을 출발하여 네로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이송될 때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나는 로도스에서 크레타로 갈 때, 갑판에 올라 그를 떠올려 보았다.

페니키아에서 크레타로 가는 항로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페니키아 지역 튀로(티레)에는 ‘크고’(euro-) 아름다운 ‘눈’(ōpē)의 에우로페 공주가 살고 있었다. 그녀에게 매료된 제우스는 희고 매끈한 소로 변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우로페 공주는 겁을 잊은 채, 홀린 듯 흰 소 등에 올라탔다. 소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고 헤엄쳐 크레타에 도착했다. 마침 내가 하얀 크루즈를 타고 있던 까닭에 에우로페의 기분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착한 크레타에서 미노아문명이 꽃피어나 유럽 문명의 시원이 되었으니, ‘유럽’(Europe)이 ‘에우로페’(Eurōpē)에서 비롯된 것은 자연스럽다. 미노아문명이라는 이름도 그녀가 크레타에서 낳은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미노스에서 따온 것이다.

세상의 ‘배꼽’에 놓은 옴팔로스

새벽에 잠이 깼다. 자고 있는 사이 크레타에 도착했다. 객실 창밖엔 어둑함과 여명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서둘러 갑판으로 나갔다. 부둣가에 우뚝 솟은 기중기들 너머 동쪽 수평선에서 해돋이가 시작되었다. 바다의 표면장력을 뚫고, 마치 알이 나오는 것처럼 태양이 힘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바다가 해를 토해내는 장관이 크레타와 얽힌 또 하나의 신화와 잘 어울렸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자식이 태어날 때마다 꿀떡 집어삼켰다. 자식들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인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권력을 차지했는데, 잘린 채 쫓겨나던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도 나처럼 너의 자식에게 쫓겨날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남편이 집어삼키는 꼴에 아내였던 레아는 화가 났다. 여섯째 아이가 태어나자 돌덩이를 강보에 싸서 내놓았다. 초조한 크로노스는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레아는 아이를 크레타섬의 아이가이온산에 숨겼다. 그 아이가 바로 제우스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레타는 제우스를 키워낸 요람이었다.

장성한 제우스는 아버지를 찾아가 구토의 효력을 가진 신비의 약을 먹였다. 크로노스는 삼킨 모든 것을 토해냈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돌덩이였고, 그다음으로 다섯명의 아이들이 모두 나왔다. 제우스는 그들과 힘을 합쳐 아버지를 몰아내고 권좌에 올랐다. 우라노스의 저주가 실현된 것이다. 제우스는 자기 대신 삼켜졌던 돌덩이를 생명의 은인이라 여겨 세상 한가운데 놓았다. 세상의 ‘배꼽’이라는 뜻의 옴팔로스 돌덩이가 놓인 곳은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피였다.

미노스의 궁전, 라비린토스

크레타섬의 북쪽 중앙에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이 있다. ‘헤라클레스의 도시’라는 뜻인데, 크레타의 수도이며 그리스에서 네번째로 큰 도시로 꼽힌다. 이곳에 우리 일행을 태운 크루즈가 정박했다. 차로 15분 정도 섬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크노소스 궁전이 있다.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가 발굴한 뒤, 미노아문명을 세운 미노스 왕의 궁전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에번스는 발굴 현장에 뒤늦게 참가하여 숟가락만 얹은 것 같다.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라는 크레타 출신의 사업가가 먼저 발굴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크노소스 궁전 터가 그 집안의 소유였다. 그의 발굴 소식이 전해지자 미케네와 트로이아를 발굴했던 하인리히 슐리만을 비롯해서 여러 고고학자들이 탐을 냈으나, 최종적으로 합류한 이는 에번스였다. 그가 크노소스 궁전을 미노스의 궁전이라고 부른 것은 전설의 미노스가 그곳의 주인이라는 신화적 확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곳이 당시에는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의 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궁전 입구에는 칼로카이리노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동상에서 몇 걸음 옮기면 발굴을 ‘완성한’(?) 에번스의 동상이 보인다. 그의 거침없는 삽질에 드러난 궁전은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모양새였다. 그는 크노소스 궁전이 미노타우로스가 갇혔던 미로의 궁전 라비린토스라고 주장했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그리스 신화에 너무도 강렬하게 사로잡혔던 모양이다. 그는 자갈과 시멘트를 이용해 발굴의 여백을 열심히 채워 넣었고, 심지어 퇴색한 유적들에 짙은 색깔을 입히는, 그야말로 고고학적 ‘만행’을 저질렀다. 라비린토스를 건설했다는 전설의 건축가 다이달로스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크노소스 궁전의 황소머리 모양의 술잔. 김헌 제공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신화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낳은 괴물이었는데 ‘미노스의 황소’라는 뜻이었다. 그의 탄생은 크레타에 내린 포세이돈의 재앙이었다. 그게 다 미노스 탓이었다. 그는 크레타의 왕이 되면 포세이돈에게 받은 황소를 제물로 다시 바치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왕좌에 오른 뒤에는 황소가 탐이 나 빼돌리고 다른 소를 제물로 바쳤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몸이 달아오른 그녀를 위해 다이달로스는 감쪽같은 암소의 모형을 만들어 파시파에가 그 속에 들어가 있게 했다. 가짜 암소를 본 황소가 코를 벌름거리며 달려들었다. 그 묘한 짝짓기의 결과로 얼굴은 황소면서 몸은 인간인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미노스에게 아내가 낳은 반인반수의 괴물은 골칫거리였다. 난폭하기 그지없고 소란을 피우면서 사람까지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괴물을 안전하게 가둘 수 있는 궁전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솜씨 좋은 건축가는 누구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미로의 궁전 라비린토스를 건설했고 그곳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놓았다. 배고플 때마다 울부짖는 야수를 달래기 위해 수시로 사람을 집어넣어야 했다. 당시 에게해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미노스는 아테네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매년(일부 기록에는 9년마다) 미혼 여성 일곱 명과 총각 일곱 명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테네의 왕자였던 테세우스는 조국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크레타로 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하고 조공의 일원이 되길 자원했다. 크레타에 도착한 그의 일행은 미로의 궁전에 던져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청년들을 구하려는 테세우스의 용기는 헛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몸집의 난폭한 괴수와 맞서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미로에서 나올 수 있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여전히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있던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리 테세우스의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탈출의 길을 안내할 실타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라비린토스로 던져질 때,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 공주가 건네준 것이었다. 그는 입구에서부터 풀어놓았던 실타래를 되감으면서 미로를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원래의 약속대로 그는 아리아드네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하고 아테네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다시 헤라클리온으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그곳의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며 감탄한 후, 그 감동을 안고 크레타를 떠나 아테네로 향하는 크루즈에 올라탔다. 마치 그 옛날 테세우스처럼.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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