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33] 피동 중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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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 찾아와라, 저녁 먹게. 동네 한 바퀴 건성으로 돌고 만화방에 갔다. 형이 거기 있을 줄 어찌 알았더라? 반지하의 어둠침침 황홀경만은 생생하다. 제 발로 들어갔다 동생한테 이끌려 나오는 심사(心思)가 어땠을까. 능동으로 시작해 피동으로 끝나는 부조화랄까. 이런 문장 자주 보는지라 떠오른 옛일이다.
‘민세상은 민세(民世) 안재홍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민세상’이라는 문장 주어에 억지로 맞추느라 손발이 안 맞았다. 기리는 주체도, 제정한 주체도 사람(단체) 아닌가. 마땅히 ‘제정한’이 자연스럽다.
‘자연환경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친환경적 탐방로가 조성될 예정이다.’ 앞의 최소화 주체는 사람, 뒤의 조성 주체는 탐방로, 이른바 문장 호응도 뒤틀렸다. 환경 훼손을 줄이려 마음먹었다면 탐방로 꾸미기도 능동적으로 할 일이니 ‘탐방로를 조성할’ 해야 어울린다.
설령 피동형으로 쓰더라도 ‘되다’로는 안 되는 말이 많다. ‘김 부장은 여러 부하한테 농락됐다.’ ‘그거 제안했는데 회의에서 외면됐어.’ 어색하다. 피동을 나타낼 때 한결같이 ‘되다’를 써 버릇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이럴 땐 접미사 ‘당하다’를 붙이면 매끈하다. ‘거부, 모방, 몰수, 반박, 신고, 압수, 제지, 추격’ 같은 말이 다 그렇다. 어감이 대체로 부정적이다.
‘되다’와는 역시 안 어울리고 ‘받다’를 써야 말이 되는 낱말도 많다. ‘도전, 문의, 미움, 버림, 비판, 신임, 양보, 용서, 존경, 지도, 칭찬, 환영’ 따위다. 마음의 움직임과 관련된 말이 많다.
어떤 것은 ‘되다, 당하다, 받다’ 등 피동 접미사 어느 것이 붙어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갈망, 결심, 고백, 맹신, 반성, 사모, 시인, 오판, 의미, 자신, 증언, 지향, 청원…. 피동형이 아예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주로 자발적 의지를 담는다는 점이 넌지시 이르는 바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방송 뉴스에서 듣고 말았다. “오후에는 비가 흩뿌려지겠습니다.” 하느님, 그냥 비가 흩뿌리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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