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미국의 명절 떡값
지난 크리스마스 연휴 전,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직원 리스트’를 현관문 밑으로 밀어넣었다. 관리소장부터 기술 직원, 프론트 담당 5명과 청소 직원 5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코로나 대유행 속에서도 여러분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 우리 직원들에게 팁을 주시려면 직접 건네시거나, 로비에 비치된 팁 박스에 넣어달라”고 했다. “통상 주민들이 직원 한 사람당 10~20달러에서 많으면 1000달러까지 준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다니는 프리스쿨(어린이집)에서 “일부 학부모들이 요청하셨다”면서 교사와 직원 명단을 정성스레 꾸며 보낸 게 무슨 이유인지 알 것 같았다. 주요 출입처인 유엔본부에도 기능직 직원들 명단이 사진과 함께 붙었다. 루돌프 썰매가 그려진 카드에 손글씨를 써서 자기 집 주소를 적은 반송용 봉투에 우표까지 붙여 보낸 신문 배달원에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명절마다 아파트 경비 직원이나 택배기사 등에게 “집에 과일이라도 사들고 가라”며 챙겨주던 집안 어른들을 봐왔다. 그런데 받는 사람이 ‘명절 떡값’을 먼저 당당히 요구하는 것을 보니 이게 최강 자본주의 국가 미국인가 싶어 놀랐다. 어쨌든 코로나로 숨 막히게 봉쇄된 뉴욕에서, 매일 버스로 출퇴근하며 종일 마스크 쓰고 일하는 아파트 직원과 택배 기사, 어린이집 선생님 등의 노고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버텼을까 싶었다. 조금씩 성의 표시만 했는데도 총 금액이 꽤 커졌다.
만약 한국에서 어린이집이나 아파트 관리사무소, 우체국 같은 데서 명절 떡값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국의 여러 필수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일도 잘 하지만 너무 양심적이었다. 고작 만원 안팎 음료수와 빵을 내밀어도, 소위 ‘김영란법’ 대상도 아니면서 마치 큰 죄나 짓는 듯 몇 번이나 사양하고 송구해하던 서울의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집배원, 아파트 청소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기자로서 김영란법 대상이 돼서 불편한 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왜 고마움을 표해야 마땅할 사람들에게까지 잠재적 범죄자처럼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하게 하는가 의아하고 답답했다.
미국은 서민들의 명절 떡값 같은 건 각자의 상식과 자유에 맡기지만, 정·재계 고위층의 뇌물죄는 천문학적 벌금과 함께 엄벌로 다스린다.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서민과 근로자들은 ‘이것 하지 말라’ ‘저건 몇 만원까지만 하라’며 온갖 규제로 옭아매고, 기부를 할 수 있는 중산층의 저변도 부동산 때려잡기 같은 것으로 쪼그라뜨린다. 반면 최고위 권력층은 ‘합법적 테두리’라고 주장하는 그들만의 카르텔 속에서 대를 이어 온갖 욕망을 좇는다.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한참 거꾸로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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