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내 안의 괴물 혹은 옆집의 괴물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2021. 1.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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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넷플릭스 제공

전통적으로 괴물은 몇 가지 원칙하에 만들어졌다. 하나는 이종결합이다. 스핑크스처럼 머리는 사람, 몸은 사자이거나 페가수스처럼 말의 몸에 새의 날개가 달린 식으로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위치의 변동이다. 영화 <판의 미로>에 등장하는 괴물처럼, 눈동자가 손바닥에 달려있을 때 괴물이라고 부른다. 이런 피조물들은 신처럼 숭앙받기도 하지만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흉측스러워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괴물은 대개 상상의 산물이기에 SF 영화나 판타지 영화에 등장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2020년 말 주목을 끌었던 콘텐츠 중 하나는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이었다. 제목과 달리 전혀 달콤하지 않은 한 아파트, 집단 거주지를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의 부제는 ‘욕망과 괴물’이라 할 만하다. <이방인, 신, 괴물>을 쓴 리처드 커니는 괴물이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의 투사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안의 지옥을 꺼내 만들어진 결과물, 그게 바로 괴물이다.

<스위트 홈>의 괴물도 그렇다. 드라마에서 괴물화의 원인은 욕망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욕망이라니 지나치게 존재론적인 변인 아닌가? 좀비처럼 물려서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공기 중 비말에 의해 감염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욕망이 어느 순간 몸을 점령해 그게 주인이 되고 마는, 그런 초유의 사태가 <스위트 홈>에 그려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욕망이 괴물의 원인이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SF의 기원이라 평가받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고자 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욕망이 이름 없는 괴물을 만들었다. 인격분리를 욕망했던 지킬 박사가 하이드를 만들었고, <스파이더맨>을 비롯한 수많은 코믹스 원작 영화에서도 욕망이 곧 괴물을 만든다. 신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박사가 언제든 신체를 복원할 수 있는 파충류의 능력을 얻어 리저드 맨이 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욕망하는 대로 이뤄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괴물이었다.

<스위트 홈>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런 괴물들이 죄다 악당이거나 빌런, 악역이었던 것과 달리 선과 악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가령 아이를 잃고 괴로워하던 엄마는 그 욕망을 실현해 괴물이 된다. 하지만 이 모성애 괴물은 아이들을 돕다가 그냥 조용히 엄마로 굳어진다. 쫓기는 아이를 폭력배들로부터 숨겨준 점액질 괴물도 있다. 그 괴물들은 오히려 인간보다 더 선하다.

<스위트 홈>의 정말 무서운 괴물들은 욕망 자체가 파괴적이었을 때 나타난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왔던 최소한의 윤리, 그것을 지탱하는 자아가 상실될 때 최악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안 그런 척, 아닌 척하며 일상을 유지해왔던 초자아가 코피와 함께 육신을 빠져나가면 욕망이 몸을 차지하고 욕망대로 변신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외형적 특징으로 괴물을 표현했지만 사실 괴물이 괴물인 이유는 외면이 아닌 내면적 추악함에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욕망은 그런 점에서 결핍과 동의어로 보인다. 아이가 없는 엄마에게 모성이 욕망이고, 체중관리에 강박을 느끼던 여성에겐 식탐이 욕망이다. 멋진 몸을 가지고 싶던 사람이 프로틴 괴물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족했던 것 그래서 늘 갈증 나던 걸 너무 많이 가져버리는 것, 그게, <스위트 홈>의 괴물들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린 이미 괴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욕망이 괴물의 원동력이면 더욱 그렇다.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싶은 욕망,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 남을 짓누르고 올라서고 싶은 욕망 등등 사실상 겉으로야 사회적 언어로 웃으며 만나지만 속으로는 흉측한 욕망을 숨긴 자들이 많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 나만 결핍을 채우면 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이미 괴물이다. 다만 똑같이 생겨서 알아볼 수 없을 뿐. 어쩌면 <스위트 홈>의 세계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적어도 판타지, 이야기 공간 안에선 괴물화가 시작되면 코피도 흘리고 외적으로 표가 나니 말이다. 현실의 괴물들이 우리와 똑같은 외모로 이웃처럼 살아간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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