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시간'보다 강한 것은..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2021. 1.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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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그래도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건 해가 바뀔 무렵이다. 한 해의 끝에 몰려 인사를 해야 할 이들에게 서둘러 문자나 톡을 보내고 있노라면, 참 많은 이들의 지지와 격려 속에서 하루하루를 헤쳐가고 있구나 느낀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평소 잘 보지는 못해도 늘 관계 속에 있던 이들, 크건 작건 도움을 줬던 이들, 마음속에 언덕으로 있는 이들. 나중엔 힘들어 살짝 요령을 부릴 마음이 들 만큼 적지 않은 수의 ‘그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을 보면서 “헛살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스스로를 더 위안하기도 한다.

밀린 숙제 하듯 한 해 인사를 했음을 고백하고 나니 민망한 마음도 든다. 그래도 진심만은 그 속에 제대로 있다. 변명하자면 그저 조금 게을렀을 뿐이다. 아무리 짧아도 모두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추듯 인사를 담으려 했다. 이상한 포즈의 사진에 글귀를 적은 연하장 돌리듯 하지는 않았다. 문구를 만들어 놓고 계속 ‘복붙’하지도 않는다. 짧더라도 마음속 그의 이야기를 꼭 담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다 보니, 유독 많이 담은 말이 눈에 띄었다. ‘시간보다 강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독한 코로나19의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이 낯설고 심란했던 긴 한 해도 결국 그렇게 저물었다. 비록 플라시보 같은 힘이라도 내보자는 다짐이자 위안이었다.

그렇다. 정말 시간보다 ‘센’ 건 없다. 지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도, 결국은 다 끝이 오기 마련이다. 코로나의 걱정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이 또한 끝이 있음을 안다. 날마다 뉴스를 통해 사람이 떠나고, 또 떠나보내는 일이 너무 가벼워져 버린 이 무력함도 곧 끝이 있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간이 끝은 아니다. 그 시간들을 견뎌내게 하는 건 뭘까. 사람들, 즉 그 시간을 견뎌내는 인간이란 종이 결국 더 강한 것이 아닌가. 공간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불확실성으로 소용돌이치는 시간을 헤치고 방향을 세우는 힘의 근원이 아닌가.

물리학자 김상욱은 “움직임이란 시간에 따른 공간의 변화”(<뉴턴의 아틀리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공간의 속도’일 것이다. 인간은 공간을 통해 관계 맺는다. 그래서 공간을 구성하는 인간의 밀도는 관계의 깊이를 단박에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비록 물리적 공간은 코로나 거리 두기로 헐거울지라도 정신적·사회적으로는 밀도를 높여 속도를 붙일 때 시간을 견디는 우리의 힘은 더 강력해진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팬데믹은 만나고, 움직이고, 소비하는 물리적 공간에 집중된 우리 삶과 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일 수 있다.

지난 한 해처럼 많은 약속들이 ‘취소’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리 마음이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때로 오히려 안도했고, 깊이 이해했다. 약속을 취소해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건 참 낯선 일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유연할 수 있다는 실감이 새로웠다. 익숙한 거리를 갈 때면 늘 주위를 살피는 마음도 그랬다. ‘그 가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잘 있을까’, 마음 졸이며 시간을 견디는 것들을 응원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정신적·사회적 공간의 밀도는 높아진다.

결국 해바뀜 즈음 뒤를 돌아보면서 감사했던 이들이 나를 지탱한, 시간을 견디게 한 힘들인 게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타인은 없다. 모두 내 삶을 구성하고 힘이 되는 존재들이다. ‘나의 권리는 곧 타인의 의무’인 것을, 반대로 ‘나의 의무 행함은 곧 타인의 권리를 지키는 것’임을 지난해처럼 실감한 때도 없다. 사실 처음일 게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불평등과 불공정의 무서움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 공간의 균열이며, 틈을 넓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는 물론 올해도 우리 앞에 놓인 것은 긴장과 고독,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물론 당분간일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버트런드 러셀의 인생을 지배한 것과 같은 ‘세 가지’ 열정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사람에 대한 열정이고, 둘은 지식에 대한 탐구이며, 셋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다.”

겨울산의 서늘한 고요와 고독처럼 지난 한 해 ‘고립’ 속에 있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아니하다. 어쩌면 앞으로 1년 뒤 또 다른 연말엔 이런 인사를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보다 강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김광호 기획에디터 겸 문화부장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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