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어묵의 추억
[경향신문]
연전에 평양 출신 실향민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음식 기억을 듣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대동강변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간식으로 ‘오뎅’을 사먹었다는 얘기였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일이다. 오뎅은 표준어가 아니니 어묵이라고 하자. 그 어묵이 술집 안주로, 길거리 간식으로 팔린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기하게도 내 어린 시절도 비슷했다. 한강이 겨울에 얼어서 스케이트와 썰매를 지칠 수 있었다.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하면 대안이 있었다. 서울 교외의 추수 끝난 논바닥이 스케이트장 겸 썰매장으로 바뀌었다. 업자들이 논을 빌려서 물 뿌려 시설을 갖추고 장사를 했던 것이다. 만국기도 걸어놓았다. 빙질이 나빠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재미있게 놀았다. 그때도 어묵은 최고의 간식이었다. 뜨끈한 국물도 같이 퍼주어서 한겨울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었으리라. 방한복이나 제대로 있었겠는가. 얼굴과 손이 얼어 터져서 쩍쩍 갈라지던 때였으니. 어묵, 떡볶이, 쇼트닝에 튀긴 핫도그가 스케이트장의 3대장 간식이었다.
지금도 길을 걷다보면 버스 정류장 같은 곳에서는 어묵포차에 사람이 몰린다. 뒤에서 보면, 차일로 반쯤 가려진 사람들의 하체만 보인다. 장거리 통근자들. 퇴근길에 헛헛하지, 날은 춥지…. 어묵이 그렇게 쓸모가 있다. 이젠 어묵이라는 말이 꽤 안착되었지만, 오랫동안 오뎅이었다. 오뎅, 어묵, 고기묵, 생선묵, 덴푸라, 어묵꼬치, 아부라기, 피시케이크, 피시볼, 가마보코(꼬). 이처럼 부르는 이름이 다양한 음식도 없을 것 같다. 계통을 조금 따지자면, 오뎅은 어묵이 일부 들어간 모둠 찜 내지 탕 요리다. 고기나 두부도 들어간다. 한국에서는 잡어를 모아서 갈아 반죽해 튀긴 것을 뜻하는 음식으로 단순화되었다. 나는 아마도 몇 트럭분의 어묵을 먹고 자란 것 같다. 도시락 반찬에, 어른이 되어서는 백반집 반찬으로, 술안주로 참 많이도 먹었다. 그중에서 제일 많이 먹은 건 사각 어묵이었다. 반찬으로 하기 제일 좋았고, 쌌기 때문인 듯하다. 부산에 가니, 한 요리사 후배가 이걸 ‘이불어묵’이라고 불렀다고 일러준다. 절묘한 작명이다. 이불을 떠올리니 웃음이 터졌다. 요즘은 옛날 어묵 맛이 나지 않는다는 분들이 많다. 사실 그렇다. 식물성 식용유를 써서 맛이 순하고, 무엇보다 생선의 품질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조기, 갈치의 어린것들을 써서 칼칼한 맛이 났는데 근자에는 거의 수입 연육에 의존한다. 옛날 맛이 살아 있는 걸 찾아보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제품 포장지 뒤에 ‘국내산 어육’이 들어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바로 옛날식 어묵이다. 조기만 갈아 넣었다고 하는 제품도 있다. 가끔 갈린 뼈도 씹히고 풍미도 진한 게 딱 어릴 적 그 맛이다.
얼마 전 일산에 갈 일이 있었다. 경의선 전차 안에서 보이는 바깥은 바로 스케이트장이 있던 그 자리인데, 다 아파트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 세대의 유소년 기억은 그렇게 또 사라져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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