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우리 사회에 '정의'가 있는가?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2021. 1. 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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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최종 선고가 임박했다. 2019년 8월29일에 대법원전원합의체는,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86억원을 삼성 계열사로부터 횡령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행위를 유죄로 확정했고, 이에 따라 10월25일에 이 부회장의 형량을 다시 선고할 파기환송심 첫 공판이 열렸다. 결국 최종 선고는 첫 공판 이후 무려 1년3개월 만에 잡힌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대법원 상고심 판결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졌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파기환송심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첫 공판에서 ‘치유적 사법’이라는 명목으로 삼성그룹에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주문하면서도, 이는 이 부회장의 형량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에 정 부장판사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이 부회장의 양형에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왜 이런 식언을 했을까? 횡령·뇌물액이 50억원이 넘으면 법에 따라 5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는데 이럴 경우에 집행유예는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재판부가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를 만들어 ‘작량감경’을 통해 3년 이하의 징역형을 선고해야만 한다. 그래서 불쑥 치유적 사법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러나 준법감시위원회 설치와 같은 치유적 사법은 기업 범죄에 대한 정상참작 사유로 인정되는 것이지, 개인 범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대법원에서 확정된 범죄는 이재용이라는 개인이 삼성전자라는 기업의 돈을 횡령해 경영권 세습을 위해 뇌물로 제공한 개인 범죄이다. 삼성전자라는 기업은 이런 개인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는 2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뇌물을 준 이 부회장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 비정상적인 사법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경제를 핑계로 삼는 여론몰이가 벌어지고 있다. 우려대로 정준영 재판부가 억지스러운 ‘지록위마’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면, 정의는 다시 한번 무너지고 건전한 시장경제 질서의 확립은 요원해진다.

이처럼 ‘가진 자’에게는 소위 ‘봐주기’식 법 집행이 횡행하는 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법 집행은 매몰차고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새해 벽두에 양부모의 상습적 학대로 사망한 ‘정인이 사건’이 다시금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다.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와 한 방송사에서 시작한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로 사회적 공분이 재점화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정인이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청주 아동학대 암매장사건, 울산 입양 아동학대 사망사건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바뀐 것은 없었다. 이번 ‘정인아 미안해’ 챌린지는 과연 아동학대에 관한 미비한 법률, 무성의한 법집행, 보여주기식 대책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또한 한 차례 휘몰아쳤다가 결국 잊혀지는 사회적 공분의 반복이 될까?

기득권의 이익에 반하는 ‘정의’는 더 실현되기 어렵다. 2018년 12월11일 새벽에 홀로 석탄 운반용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24세 김용균 청년이 벨트에 끼여 사망했다. 김용균 청년 이전에도 구의역 김군이 있었고, 이후에도 매년 우리 사회에서 2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산재로 숨지고 있다. 위험의 외주화에 따른 안전사고를 방지하고자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21대 국회 개원에 맞춰 발의되었고, 원안대로 법이 통과되기를 호소하는 김용균 청년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다른 사건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농성이 4주째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거대 여야는 원청 기업과 경영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독소조항으로 가득한 법안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으면 기업하기 좋고, 그러면 경제가 잘된다는 천박하고 전근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사회적 약자에게는 매몰차나 기득권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과연 정의가 있는가라고 절규하게 된다.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사변적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대변하는 법이 만들어지는 것이 정의의 필요조건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정의가 있어야 시장도 사회도 작동할 수 있다.

현실의 ‘부정의’에 절규하고 공직자와 정치인들을 질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도 지금의 ‘부정의’에 소극적 공범이다. 정의에 부합한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감시하고, 선거로 견제해야만 우리 사회가 정의로워질 수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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