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예술과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⑨]
[경향신문]
과학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측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담아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 사이
고뇌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
과학적 방법론은 지금까지 쌓여온 경험에서 얻어낸 지식과 지혜로부터 미래의 모습을 예측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순 없기에 과학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측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완벽히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며 우리는 희망이라는 안경을 쓰고 좋은 일들이 있기를 바라지만, 갑작스러운 자연의 변화나 인간의 우둔한 행위로 인해 손쓸 새도 없이 인류가 멸종하거나 문명이 파괴되어버리는 절망적인 가능성 또한 상존한다. 오늘은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고뇌했던 예술가와 과학자들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1908~1992)은 프랑스 태생으로 20세기 현대음악의 대가이자 조류학자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새들의 지저귐을 표현한 음악으로 유명하며, 소리를 듣고 눈으로 색깔을 느끼는 공(共)감각 능력을 작곡에 활용한 것이 그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 수 있던 비결이었다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서양 고전음악이라고 하면 하이든·바흐의 17세기 바로크 시기부터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쳐 라흐마니노프의 20세기 초반 사이에 선율과 음의 어울림(화성)을 중시했던 공통 관례기(common practice)의 음악을 뜻하는데, 그와 사뭇 다르게 메시앙의 음악은 청중으로 하여금 숲속이나 광활한 협곡에서 부는 자연의 바람 소리가 느껴지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그런데 메시앙은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Quatour pour la fin du temps)’라는 섬뜩한 제목의 곡을 짓기도 하였다. 이 곡이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39년 나치 독일의 침공에 맞서 참전했던 메시앙은 생포되어 괴를리츠(현 폴란드 지로젤리츠)의 제8A 포로수용소(Stalag Ⅷ-A)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연주자를 만난 메시앙은 이 곡을 짓고 자신의 회고로는 ‘무너지기 직전이던’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포로들과 독일군 간수들을 모아놓고 엄동설한에 초연을 펼쳤다. ‘세상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라는 제목의 영감은 다음의 요한계시록 구절에서 받았다고 한다.
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2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5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6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새번역 성서)
미켈란젤로의 바티칸 시스틴 성당 천장화 일부인 ‘최후의 심판’에도 잘 표현돼있는 메시아의 재림에 이은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는 혼란스러운 풍경의 시작인데, 4000만명이 목숨을 잃은 전대미문의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뒤 한 세대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두 배에 달하는 8000만명이 목숨을 잃게 될 또 한 번의 끔찍한 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겪고 있던 메시앙은 절대자가 가져올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천사의 나팔소리를 오히려 구원의 소리로 여기고 음악으로 표현해냈던 것이다.
과학의 영역에서는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프랑스 북부의 루앙이라는 도시에서 자라나던 파스칼은 이미 10대 때 세금 징수원이었던 아버지가 쉼없이 손으로 덧셈과 검산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위해 파스칼린(pascaline)이라는 세계 최초의 기계계산기를 고안해내는 등 남다른 수학적 재능이 있었고, 이 재능은 이후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에 각각의 가능성을 숫자로 표현하는 ‘확률’을 고안해내도록 하기에 이른다. 이에 기반해 상금을 걸고 노름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노름을 일찍 마치고 싶을 때 그 상금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기대값(expected value)’ 등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금융, 보험, 경영의 영역에서 리스크 판단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들을 만들어내 진정한 미래 예측의 선지자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파스칼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단순 반복적인 계산이나 노름꾼들의 이익을 예측해주는 것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의 해결뿐이 아니었다. 차가운 과학적 합리성의 상징과도 같은 숫자를 통해 인류의 숙원인 미래의 불확실성 정복을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확률론이라는 방법을 만들어주었지만 머릿속에는 불확실성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이 깊이 자리 잡은 고뇌의 존재였다. 파스칼의 문제의식과 해결에 대한 시도는 그가 남긴 글모음인 <팡세>(Pensees, ‘생각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 프랑스어 산문의 최고봉이라고도 꼽히는 <팡세>에서 파스칼은 인간이 아무리 전 우주의 장엄함을 완벽히 이해하고 싶어해도 한정된 크기의 몸에 달린 감각만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공간이란 자연의 넓은 품에 비하면 미세한 원자 하나의 크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하고 생각의 폭을 넓혀본다 한들 우주의 끝을 볼 수 없다는 한계는 바뀌지 않는다는 고뇌를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끝없이 거대한 세계의 무한한 장벽에 막혀버린 인간이 눈길을 돌려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해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스칼은 길이가 1㎜도 되지 않는 진드기를 예로 든다. 처음엔 인간의 시력만으로 진드기의 다리와 몸통 모양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지만, 진드기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또다시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으로 끝없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또 한 번 넘을 수 없는 무한의 장벽을 마주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파스칼은 인간을 아주 큰 무한(거대우주)과 아주 작은 무한(미세우주) 가운데에 갇혀있는 유한의 존재로서 완벽히 알 수 없는 두 극한 사이에서 불확실성의 배를 타고 떠다니는 신세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파스칼은 혹시 확률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미래의 불확실성을 깊게 이해할 수 있던 능력 때문에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파스칼이 인간을 “자연의 본성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불타는 열정을 지녔지만 결코 그것을 실현시킬 수 없는 불완전의 존재”라고 한 것은 아마 자신을 연민하며 내뱉은 말일지도 모른다. 존재의 불안을 떨칠 수 없던 파스칼은 또한 메시앙처럼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데, 확률론을 만든 사람답게 “모든 인간은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내기에 참여하고 있는데,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 제일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파스칼의 내기’라는 논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메시앙이 음악을 통해 절대자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괴로운 수용소 생활로 인한 절망감을 이겨내려 했듯이, 파스칼은 자신의 지능을 이용해 절대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인간의 선택과 행위의 길잡이가 되어준 확률론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마음의 평화를 위해 받아들인 신앙을 이유로 병든 몸의 치료를 거부하며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린 파스칼의 허무한 결말에 대해서는 과학자로서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갖게 된다. 비록 파스칼의 논리대로 인간이 결코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문제적 존재’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파스칼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무한의 장벽을 인간이 하나씩 허물어가며 불확실성을 정복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파스칼의 그 업적들이었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인간의 한계에 대해 조금만 덜 절망하고 살아남았더라면 인류 과학의 발전이 수십년은 더 앞서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상상력과 사고력만 남아있다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파인먼의 ‘궁극의 희망’은
문명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 이후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유효한가
이러한 파스칼과 대비된다고 할 수 있는 과학자로서 오늘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인물은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1918~1988)이라는 물리학자이다. 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파인먼은, “다른 물리학자와 두뇌를 바꿀 수 있다면 누구의 두뇌를 갖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파인먼이라고 대답하는 물리학자들이 제일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비상한 물리학적 두뇌를 지닌 사람이었고,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우주 사이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파스칼과는 달리 현대과학의 위력을 본격적으로 보고 자란 20세기 사람이어서 그런지 과학에 대한 깊은 믿음과 낙관적인 사고를 갖고 걱정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유쾌한 일화들을 수없이 남기고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촉망받던 젊은 시절 핵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로서 인류는 언제든 한순간에 스스로를 파괴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파인먼은 대재앙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파괴되고 모든 과학적 지식이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모든 지식이 사라진 세상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할 후대의 생존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달하겠다고 했다.
“나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서로의 주위를 돌면서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작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진 원자로 만들어져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여기에 아주 조금의 상상력과 사고력만 발휘한다면 자연과 우주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탄생한 이후 30만년 동안 이루어온 발전의 흔적이 사라져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절망하기에 앞서 세상에 그만큼 번거로운 일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파인먼은 인간의 상상력과 사고력만 남아있다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궁극의 희망을 표현했다.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우리의 후손들에게 한 가지를 말해줄 수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네트워크과학·복잡계과학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시스템스 생물학을 연구하고,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제주도에 현무암 상징물 ‘팡도라네’를 공동 제작·설치했고, 대전시립미술관의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 X’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창시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남는 시간에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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