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폭설 속 라이더
[경향신문]

오랜만에 눈다운 눈이 왔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온 세상이 하얗다. 큰 건물, 작은 건물 가리지 않고 모두 눈에 덮였다. 온갖 상념이 이어진다. “너네는 큰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도 하얗지”(한돌의 노래 ‘못생긴 얼굴’의 한 토막)
어제 오늘 내린 눈이 북극발 한파에 얼어붙었다. 8차선 도로, 주택가 골목길 할 것 없이 죄다 얼음판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낭만이라면, 땅에 얼어붙은 눈이 만든 빙판길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때에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 등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이다. ‘집콕’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주문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을 맞으며 빙판 위에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배달노동자들에게 눈은 공포 그 자체다. 라이더유니온이 긴급성명을 냈다. 라이더유니온은 “현재 곳곳에서 라이더들이 넘어지고 있다”면서 “경사가 가파른 언덕에 오른 라이더들은 고립됐다. 지금 배달 일을 시키는 것은 살인과 다름없다”고 호소했다. 시민들도 호응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주문을 자제하자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한 시민은 “눈길이 위험하고 당장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젯밤에 주문을 취소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다른 날로 변경해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온라인에 글을 남겼다. 배달업계도 서비스를 잠시 중단하거나 배달 품목을 축소하고 있다.
추위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기상청에 따르면 8일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7도를 기록하고, 여기에 바람까지 강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이번 한파가 지나도 봄이 오려면 멀었다. 밖에 나가지 않고 편안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배달 서비스는 효용이 높다. 비용을 지불하면 누릴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다. 하지만 눈 오는 날 음식 주문은 절제할 필요가 있다. 불가피하게 음식을 배달시켜야 한다면 재촉하지 말자. 문 앞에 감사 메모라도 한 장 붙여놓는 건 어떨까. 작은 배려가 추운 겨울을 녹이고, 배달노동자들의 목숨을 구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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