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칼럼] 사면론, 의미 큰 첫 통합 메시지
문 대통령 의지로 봐 무방한 사면론
사면은 죄질, 사과와 무관한 정치행위
배타 독선의 정치문화 바꾸는 계기로
주로 생계형 경범죄가 대상인 일반사면은 ‘임금의 은사’처럼 받아들여졌다. 어려워도 법 지키며 사는 이들과의 형평성 논란 정도나 있었다. 그러나 특별사면이 여론의 지지를 받은 적은 없다. 정치적 계산이 깔린 권력집단 간의 거래로 보이기 때문이다.
추미애 터널을 빠져나오자 돌연 이낙연 민주당대표의 사면론이 새해 벽두를 덮었다. 사면권은 철저히 정치공학적으로 행사되는 민주사법체계의 예외적 권한이다. 그러므로 “국난 극복을 위한 국민의 힘 결집을 위해” 따위의 포장에는 눈길 줄 것도 없다. 당장의 보궐선거와 대선정국을 앞두고 고착화하는 지지율 하락이 배경임은 다들 짐작하는 바다.
그렇더라도 사면론의 의미는 크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 대표 혼자 불쑥 던졌다면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자 자기파괴적 독립선언이다. 여간해선 선을 넘지 않는 그의 스타일이 아니다. "대통령 기자회견을 들으면 어떤 맥락에서 사면을 꺼낸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대통령의 공감 내지 승인의 정황이다.
현 정권이 열성 지지자들만을 안은 배제와 독선, 적대의 정치로 일관해 왔음은 재론의 여지도 없다. 노무현 경험에서 비롯된 강고한 단결 의지와 복수심이 근원이다. 이런 정권에서 가해자인 MB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용서하겠다는 놀라운 언명이 나온 것이다. 현실화한다면 이는 문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지금껏 견지해 온 노선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일이 된다. 거대한 승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사면은 문빠로 통칭되는 열성 지지층과의 새로운 관계설정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상하지 않다. 총대를 멘 이 대표는 이미 열성 지지층으로부터 분노의 난타를 당하고 있고, 86세대를 주축으로 한 당내 강경주류도 대놓고 하극상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이들과 일정 부분 결별할 수도 있다는 결기를 품지 않고서는 화두를 던질 수 없는 것이 MB·박근혜 사면론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전임 대통령의 사면에 정서적 거부감이 크다. 정당하지 않은 돈 문제와 국정농단으로 단죄받은 이들이다. 죄질에 비해 처벌이 과하다는 견해도 있으나 국가 최고운영자의 책임과 권한의 막중함, 파괴적인 영향을 감안하면 그리 볼 것도 아니다. 일반 법 감정이나 사법 정의 차원에서도 장삼이사의 위법보다 훨씬 무겁게 징치돼야 함이 맞다. 어쨌든 사면은 사법 아닌 정치의 영역이다.
돌이켜보면 집권 초까지 문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릴 만큼 이상적이었다. 공정·평등·정의의 국정원칙에서부터 비(非)지지층과 야당을 아우르는 열린 소통 약속, 심지어 전임자들 단죄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그게 80%가 넘는 국민적 지지를 받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후 동일인이 의심될 만큼 정확히 반대 행보를 이어온 결과가 온건중도층을 다 잃고 30% 남짓의 열성 지지층에 갇혀 버린 작금의 형세다.
그러므로 사면은 우리가 알던 본래의 ‘문재인다움’을 회복하고 그동안의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상징적 첫걸음이다. 사과에 미련 둘 것도 없는 오직 자기개혁적 선언이다. 97년 대선국면에서 DJ의 전·노 사면공약도 얕은 책략으로 여겨져 지지층에서도 거센 비난이 일었다. 집권 후 비서실장 등 주요 보직에 5공 참여자까지 마다않은 탕평인사 등으로 통합의 진정성을 인정받으면서 확실한 국정동력을 얻었다.
사면의 실행 여부에 관계없이 처음 접하는 통합 메시지는 일단 반갑다. 사면론을 계기로 문 대통령은 확실히 기로에 섰다. 얼마 안 남은 재임기간에 위험하지만 마땅히 옳은 국민통합의 가시밭길을 갈지, 아니면 시효가 다해 가는 정파의 수장으로 역사에 또 한 명의 퇴행적 지도자로 남을지다. 중순 회견에서 그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준희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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