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칼럼] 레이건주의의 사망

송영규 기자 2021. 1. 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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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감세·작은 정부론 주장과 다르게
긴급실직수당에 취업률 상승 등
큰 정부 지원이 괄목할 경제성과
2020년 한해 우리가 배운 교훈
폴 크루그먼
[서울경제] 그건 아마도 주변의 시선 탓이었을 터다. 올 1월 20일 이후 도널드 트럼프의 추한 꿍꿍이 속내를 살필 필요는 없겠지만 제아무리 공감 능력이 없는 트럼프라고 할지라도 긴급 실업수당 시한 만료로 수백만 가구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한가로이 골프를 치는 자신의 모습이 대중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그는 경기부양법안에 서명했다. 새로운 경기부양법은 1차 부양 패키지에 담겨 있던 비상 지원 조치의 적용 시한을 수개 월간 연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실직자들은 트럼프의 서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정책의 성공을 측정하는 지표는 아니지만 주식시장의 선물지수 역시 상승했다. 골드만삭스도 2021년 경제성장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어려운 시기를 맞아 위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정부의 지원은 비단 수혜자들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지난해 우리가 배운 교훈이다. 바꿔 말하자면 지난 2020년은 레이건주의가 사망한 해라는 것이다.

레이건주의는 감세를 마법의 만병통치 처방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푸닥거리 경제학(voodoo economics)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술 경제학을 신봉하는 세력은 돌팔이 학자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공화당이 전부다.

필자가 말하는 레이건주의는 그보다 광범위한 개념,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거나 평범한 대중의 생활을 개선하려면 먼저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지도록 지원한 후 여기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이 하위 계층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낙수 효과’ 정책에 대한 믿음 전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2020년 공화당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레이건주의를 미뤄둔 채 공적 개입 정책을 택했고 실제로 어려움에 처한 대중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낙수 효과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트럼프는 급여세 삭감을 연이어 주장했고 행정명령을 통해 이를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급여세 인하는 이미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새로운 경기 부양 패키지에도 수십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는 기업 식대 세금 공제 조치가 포함돼 있기는 하다. 석 잔의 마티니를 곁들인 ‘비즈니스 식사’에 세금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팬데믹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해소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준다는 것인지 영 모르겠지만 말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 자체를 마뜩잖아하는 공화당 내부의 레이건식 적대감도 여전하다.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은 아직도 실직자 지원이 오히려 실업률을 높인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이들 중 대다수가 아예 취업을 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치명적 바이러스로 경제 봉쇄를 강요당한 미국의 국가적 필요에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은 제대로 반응했다. 실직자 지원과 직원들의 고용을 유지하는 업체들에 대한 기업 대출 탕감은 이들이 짐으로 져야 하는 고통과 부담을 줄였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지급된 직접 지원금은 특정 대상을 향한 최고의 정책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 소득에 큰 보탬이 됐다. ‘큰 정부(big government)’는 효과를 냈다. 일시적으로 2,2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정부의 지원이 이어진 기간 동안 빈곤율은 하락했다.

물론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부작용도 없었다. 그럼에도 긴급 실직 수당이 제공되던 4월부터 7월 사이 900만 명의 미국인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면서 취업률은 크게 상승했다.

정부의 대규모 차입에 따른 심각한 영향도 없었다. 적자 매파들이 항상 입에 걸고 다니던 경고가 빗나간 셈이다. 이자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인플레이션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는 공적 지원을 제공했고 괄목할 만한 효과를 거뒀다. 유일한 문제는 지원이 너무 일찍 종료된다는 점이다. 비상 지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일관되게 지속돼야 한다. 설사 올해 광범위한 백신 접종이 이뤄진다고 해도 경기부양법에 담긴 지원 중 일부는 계속돼야 한다. 지난봄 우리가 배운 교훈은 적절한 예산을 동반한 정부 프로그램이 빈곤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팬데믹이 끝나기 무섭게 그 같은 교훈을 잊어버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필자는 2020년을 레이건주의가 사망한 해로 규정했지만 이를 신봉하는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은 계속 그들의 믿음을 전파하려 들 것이다. 사실 푸닥거리 경제학은 공화당 내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제 혜택을 얻어내기 위해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억만장자 기부자들에게 이들의 경제정책은 대단히 유용한 도구다.

당연히 숨이 끊어졌어야 할 레이건주의는 좀비 레이거니즘으로 모습을 바꾼 채 워싱턴 정가를 어슬렁대며 정치인들의 뇌를 파먹고 있다.

2020년에 우리가 터득한 교훈은 위기 상황에서 혹은 그보다 다소 안정된 시기에도 정부가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정부라는 점 역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가 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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