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성역할이 사라진다면 더 자유로워질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인터뷰]

김지혜 기자 2021. 1. 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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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만화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의 작가 샤이앤(왼쪽)과 말랑의 캐릭터. 샤이앤 작가는 인어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되고 싶어하던 ‘인어공주’를 트랜스젠더 이야기라고 생각해 인어공주의 ‘보라색 조개껍데기’를 캐릭터에 사용했다. 말랑 작가는 압박과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롭게 헤엄치듯 살고 싶은 꿈을 반영해 물고기 캐릭터를 만들었다. 샤이앤·말랑 작가 제공.


살아 숨쉬는 우리 모두는 여기에 ‘있다’. 세상에 ‘있는’ 채로 울고 웃고, 성취하고 실패하며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자신이 여기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 트랜스여성 샤이앤 작가, 트랜스남성 말랑 작가가 의기투합해 만화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를 출간한 것은 그 용기의 일환이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공기처럼 만연한 세상에서, 이들은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수도 없이 부정당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 목소리를 낸다.

“어떤 식으로든 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요.” 지난달 화상 인터뷰로 만난 말랑 작가는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샤이앤 작가가 연재하던 트랜스젠더 웹툰을 읽고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2019년부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샤이앤 작가는 “트랜스젠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접근성 좋은 매체를 생각하다 만화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각자 만화를 언어로 삼은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건, 함께 책을 내보자는 출판사 대표의 제안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의 한 장면. 트랜스여성 역시 시스젠더 여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꿈꾼문고 제공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만 정보가 없는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많이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두 작가의 목표는 일치했다. 트랜스젠더가 무엇인지, 어떤 곤란을 겪는지, 트랜지션의 과정은 어떤지 등 트랜스젠더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정보를 그려내고 싶었다. 말랑 작가는 “저는 트랜지션 정보를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로부터 알게 된 오픈카톡방에서 얻었다”며 “저처럼 고립을 겪고 있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두 책은 각각 트랜스 여성과 남성의 정체화, 커밍아웃, 사회적·의료적·법적 트랜지션, 연애 등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책은 시스젠더(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동일한 사람)가 다수를 이루는 이 사회의 통념 속에서, 미처 해석되지도 알려지지도 못한 트랜스젠더 이야기들을 명랑하게 망라해낸다. 통념처럼 트랜스젠더는 여자에서 남자, 남자에서 여자가 된 사람이 아니다. 샤이앤 작가는 책에서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명확한 정의를 통해 다수의 트랜스젠더가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 즉 성별에 관련된 불일치감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는지 설명한다. “젠더 디스포리아를 시스젠더에게 완벽하게 이해시킨 경험은 한 번도 없다”는 말랑 작가의 말처럼, 트랜스젠더 고유의 경험들은 종종 시스젠더 중심의 사고체계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다.

샤이앤, 말랑 작가는 성별 정체성은 사회적 성역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닌 오직 스스로 어떤 성별로 정체화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내 이름은 말랑, 트랜스젠더입니다>의 한 장면. 꿈꾼문고 제공


‘너는 네가 왜 남자·여자라고 생각해?’라는 시스젠더의 질문 앞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모르겠다”는 답을 내놓는 것은 그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는 치마와 화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여자라고 느끼거나, 바지와 짧은 머리를 좋아해서 남자로 정체화하는 것이 아니다. 샤이앤 작가는 “시스젠더들이 자신의 염색체나 신체를 확인하기 전부터 자신의 성별을 알고 있는 것처럼, 트랜스젠더도 마찬가지”라며 “성별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단 하나뿐이다. 스스로 어떤 성별로 정체화하는가에 온전히 달려 있다”고 말했다.

시스젠더·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굳어진 사회적 성역할은 오히려 이들을 옥죄는 족쇄가 된다. “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패싱’이라고 해요. 저도 한때는 트랜스젠더가 패싱에 너무 집착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성별 정체성이 여성인 제가 머리를 짧게 자른다고 남성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결국 패싱은 생존의 문제였어요.”(샤이앤)

여자는 ‘여자다워야’,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사회적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 트랜스젠더는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심지어 의료적·법적 트랜지션에 필수적인 성전환증 진단을 내리는 정신과 의사 다수는 여전히 사회적 여성성과 남성성의 기호를 물으며 성별 정체성을 확인한다. 예컨대 머리를 기르거나 꾸미는 데 관심이 없는 트랜스여성은 ‘여성성의 기호’를 요구하는 의사 앞에서 ‘진단 불가’의 대상이 돼 버린다.

심지어 의료적·법적 트랜지션에 필수적인 성전환증 진단을 내리는 정신과 의사 다수는 여전히 사회적 여성성과 남성성의 기호를 물으며 성별 정체성을 확인한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의 한 장면. 꿈꾼문고 제공


트랜스젠더는 사회적 성역할을 가장 극심하게 강요받는 피해자에 가깝다. 말랑 작가는 “사회적 성역할이 없어진다면, 트랜스젠더 역시 디스포리아 때문에 고통받는 일도 적어질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훨씬 개성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별 고정관념이 사라진 세상에서 트랜스젠더는 더 자유롭고 다채롭게 존재할 수 있다. 이들이 탈코르셋 등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을 응원하는 이유다.

“흉터가 될 뻔한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고 깨끗하게 소독하는 과정 같았어요. 물론 아팠지만,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죠.” 말랑 작가는 책을 펴낸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혐오와 차별에 지친, 치유가 필요한 트랜스젠더에게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여전히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두 권의 책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다’는 감각이 혹독한 추위도 잊게 한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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