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서정진의 아름다운 퇴장 / 곽정수
[아침햇발]
곽정수ㅣ논설위원
“12월 말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납니다.”
지난달 22일 셀트리온 방송조회. 서정진 회장이 직원들에게 정식으로 고별인사를 했다. 그가 65살 정년 퇴임 약속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은 2년 전인 2019년 초다. 많은 사람이 설마하며 믿지 않았다. “회장에게 무슨 정년이냐“는 반응이었다. 재벌 총수는 죽거나, 건강악화로 경영이 어려워야 물러나는 게 오랜 관행이다. 하지만 서 회장은 보란 듯이 약속을 지켰다.
마침 서 회장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그는 무보수 명예회장으로 물러난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직접 챙겨온 코로나 치료제 개발은 국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당국의 승인과 시판이 이뤄질 때까지 맡을 계획이라고 했다. 이후에는 바이오산업과 4차산업혁명을 결합한 유비쿼터스헬스케어 분야에 새롭게 도전한다.
총수의 조기 퇴진 사례가 드물기는 하지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 구자경 엘지 명예회장이 1995년 70살에 물러났다. 이웅열 전 코오롱 회장도 2018년 62살에 갑자기 퇴진했다. 하지만 서 회장의 퇴진은 2015년 회사에 정년제를 도입하면서, “회장도 예외가 없다”는 원칙 아래 이뤄졌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회장은 왕이 아니다”는 서정진 특유의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총수가 절대권한을 휘두르며 ‘황제경영’을 하는 기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서 회장의 정년 퇴임이 재벌 전체, 나아가 한국경제에 큰 의미를 갖는 이유다. 그의 파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다. 회사 최고경영자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아들은 계열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대주주 역할만 한다. 불법·편법 상속의 단절도 약속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 부자순위를 업데이트한다. 서 회장은 상장주식 기준 재산이 7일 현재 173억달러(11조8천억원)로 한국 최대부자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에게 아직 회사 주식을 단 한주도 넘기지 않았다. 대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의 2배 수준인 상속세율이 적정 수준으로 인하되기를 바란다.
총수의 정년 퇴임, 소유-경영 분리, 불법·편법 상속 단절 모두 재벌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흙수저 출신인 그는 맨손으로 창업에 뛰어들어 불과 20년 만에 재계 40위권의 대기업을 일군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코로나 치료제 개발로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80년 간 굳어진 재벌 관행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며, 재벌 역사를 새로 쓰는 서정진의 ‘아름다운 퇴장’은 사업적 성공이나 코로나 치료제 개발에 못지않은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잘못이었습니다. … 모두가 준법 안에 있는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지난달 30일 열린 삼성 뇌물공여 사건 파기환송심 결심공판.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최후진술에서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 비록 실형 모면용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재계 1위 삼성의 총수가 눈물로 준법경영을 다짐한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5월 대국민 사과 때 약속한 4세 경영승계 포기와 무노조경영 종식의 이행도 다짐했다.
‘서정진의 퇴장과 이재용의 눈물’은 각기 한국 재벌체제의 변화 가능성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중대한 사건들이 2020년 말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은 매우 극적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기존 재벌체제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조짐은 진작에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2019년 3월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 회장의 이사 선임 안건이 주주 반대로 부결됐다. 재벌 총수가 기업의 ‘오너(주인)’ 행세를 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법을 저지른 총수에 대한 ‘봐주기 특혜’도 더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재벌은 오랫동안 한국경제의 발전을 주도해 왔지만, 한계 또한 분명히 보여줬다. 20여년 전 외환위기 때는 무리한 외부 차입에 의존한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재벌 경영방식이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황제경영, 경영 세습 등 재벌체제의 핵심인 소유지배구조는 고수했다.
재벌의 변화는 두가지 경로가 가능하다. 서정진 회장처럼 금수저 출신이 아닌 자수성가형 기업인에 의해 주도될 수도 있고, 기존 재벌의 자기 혁신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재벌이 살아 남으려면 변화를 위한 경쟁이 불붙어야 한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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