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몰락·당쟁 역사 깃든 '피의 충성 서약물' 국보 승격

노형석 2021. 1. 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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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상 앞에 올린 산짐승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과 신하는 엄숙한 표정으로 흐르는 피를 쟁반에 받아 나눠 마시며 의기투합했다.

조선시대에도 제왕이 종종 공신들을 불러 짐승 피를 함께 마시는 회맹제를 벌이며 충성 맹약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에 등장하는데, 1680년 숙종이 벌인 제사는 유난히 규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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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때 제작된 '회맹제' 공식기록 '이십공신회맹축'
기사환국·갑술환국 등 역사적 사건이 배경에 깔려
국보로 지정예고된 <이십공신회맹축>(1694년 제작)의 시작 부분.

제상 앞에 올린 산짐승 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과 신하는 엄숙한 표정으로 흐르는 피를 쟁반에 받아 나눠 마시며 의기투합했다. 1680년 8월30일,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재위 6년째를 맞아 이런 엽기적 퍼포먼스가 들어간 충성서약 의식을 벌였다. 창업 이래 공훈을 세운 역대 공신과 후손 412명을 불러들여 ‘피의 연대의식’을 진행한 것이다. 천지신명 앞에 충성을 다짐하는 큰 제사 ‘회맹제(會盟祭)’였다.

회맹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의 동맹을 위한 ‘음혈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7세기 신라 문무왕의 통일전쟁 시기 당의 강요로 멸망한 백제 의자왕 아들인 부여융과 문무왕이 공주 취리산에서 백마의 피를 나눠마시며 회맹제를 치렀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도 제왕이 종종 공신들을 불러 짐승 피를 함께 마시는 회맹제를 벌이며 충성 맹약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에 등장하는데, 1680년 숙종이 벌인 제사는 유난히 규모가 컸다.

국새가 찍힌 <이십공신회맹축>의 말미 부분.

당대 문헌을 보면 1680년 회맹연의 원래 초청 대상은 모두 489명. 연로하거나 상을 당한 사람, 귀향한 사람이 빠져 412명이 참석했다고 기록돼 있다. 1392년 이성계의 왕조 창업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부터 바로 그해 4월 숙종이 주도한 정변에서 남인 정권을 뒤엎고 서인 정권을 세우는 데 기여한 보사 공신까지 무려 20종의 공신과 후손을 모조리 소집해 제사에 참여하게 했다.

341년 전 숙종이 나라의 가장 큰 제사로 열었던 회맹제의 공식기록물이 국보가 된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실 문서인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국가지정보물)>를 승격시켜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7일 발표했다.

가로 길이가 무려 25m에 이르는 <이십공신회맹축>은 1680년 회맹제를 기념해 1694년 만들었다. 회맹제의 기록을 숙종과 후대 임금들이 직접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역대 최대 규모의 두루마리 왕실 문서다. 앞머리를 보면 촘촘하게 직조한 옅은 황비단 위에 붉은 선을 가로세로로 치고 단정한 해서 글씨체로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이란 한자 제목을 적었다. 뒤이어 종묘사직에 고했던 제문인 회맹문과 역대 공신과 후손 489명의 명단을 적은 회맹록, 종묘에 올리는 축문, 제문이 이어진다. 축의 말미에는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를 적은 뒤 ‘시명지보(施命之寶)’라는 국새를 찍어 왕실 문서의 격식을 갖췄다. 문서의 양 끝은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을 덧대고 위아래를 옥(玉)으로 장식한 축으로 마무리했다. 왕에게 보고한 어람용 문서에 걸맞게 고급스럽다.

문화재위원회가 회맹첩의 국보승격에 의견을 모은 것은 제사 시점과 문서 제작 시점의 ‘시차’ 때문이다. 무려 15년이나 차이가 난다. 기록의 나라였던 조선에선 왕실의 결혼이나 장례, 제사 등의 큰 행사 때 전담 기관이 신속히 편성돼 1~2년 안에 의궤 등의 관련 기록집이 나왔다. 그런데 <이십공신회맹록>은 왜 행사가 치러진 지 10여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만들었을까. 그 배경엔 숙종 재위 기간(1674∼1720년)에 일어난 장희빈의 궁중 스캔들과 조정 내 당파 간 치열한 권력투쟁이 깔려있다. 당시 남인들과 맞서던 서인들은 1680년 숙종이 남인 중신들을 역모 혐의로 축출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정권을 차지한다. 이때 서인의 중신인 김만기, 김석주, 이입신, 남두북, 정원로, 박빈이 보사 공신으로 지명된다. 그러나 이들은 9년 만인 1689년 공신 지위를 박탈당한다. 숙종이 후궁 장희빈을 왕후로 앉히고 장희빈이 낳은 아들 윤(훗날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에게 정권을 내주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난 탓이었다. 그러나 곧 반전이 펼쳐진다.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실권을 잡은 장희빈 일가의 도를 넘는 행동에 염증을 느낀 숙종이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를 복귀시키고 남인들을 다시 내친 것이다. 서인들은 정권을 탈환하자 중신 6명의 공신 지위도 회복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숙종 연간에 지정된 보사 공신 관련 문헌은 공신으로 지위를 부여한 녹훈(錄勳)부터 지위를 박탈하는 삭훈(削勳), 회복하는 복훈(復勳)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적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실물 사료로 오래전부터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회맹축에는 제사 뒤 15년 동안 종잡을 수 없이 어지러웠던 궁중 암투와 당쟁의 속사정이 배어있는 셈이다.

더불어 특기할 만한 건 어람용 회맹축의 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가 함께 전해진다는 점이다. 긴 두루마리의 글씨는 서사관(書寫官)으로 발탁된 문신 이익신이 썼고, 붉은 선은 화원 한후방이 그렸고, 평안도에서 나는 옥이나 상아, 비단 등의 최고급 재료를 활용했다는 사실과 숙련된 장인을 차출하기 위한 논의과정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 공신의 충성 맹약을 받는 회맹제가 있을 때마다 어람용 회맹축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10년까지 문헌을 통해 확인된 건 1646년(인조24)년과 1694년(숙종20), 1728년(영조4)에 만든 것밖에 없다. 영조 때 만들어진 회맹축은 전해지지 않고, 1646년 제작된 회맹축은 국새가 찍혀있지 않다. 형식상‧내용상 온전하게 남은 어람용 회맹축은 숙종시대의 <이십공신회맹축>이 유일하다. 문화재청 쪽은 “17세기 후반 조선왕실이 서인과 남인의 거듭된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당대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압도적 크기로 제작된 조선 후기 왕실 공예품의 백미란 점에서 예술성 또한 우수해 국보로 승격시킬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경북 문경 봉암사 옥석대의 ‘마애미륵여래좌상’.

문화재청은 이와 함께 17세기 경북 문경 봉암사 옥석대에 새긴 ‘마애미륵여래좌상’과 경남 함양 등구사에 소장된 12세기 고려시대 불교용구인 ‘미륵원명 청동북’, 경남 고성 옥천사의 ‘영산회 괘불도 및 함'을 국가보물로 지정했다. 아울러 경북 구미 대둔사에 있는 17세기 불교 공예품인 ‘경장’(경전을 넣는 장)과 경북 상주 남장사의 ‘영산회 괘불도 및 복장유물’은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청은 예고기간인 30일 동안 각계의 의견을 들은 뒤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보, 보물 지정을 확정하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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