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 온', 기막히게 좋은 '대사빨'과 대비되는 빈약한 스토리
'런 온', 대사 좋고 연기 좋은데 멜로로 귀결되는 건
[엔터미디어=정덕현] JTBC 수목드라마 <런 온>의 가장 큰 강점은 '대사'가 아닐까.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로 활약해왔던 박시현 작가가 쓴 게 확실하다 여겨지는 <런 온>의 대사에는 '말 맛'이 있다. 이를 테면 육상부 대표팀에서 상습적인 폭행 사실을 폭로하고 달리기를 그만두겠다 선언한 김우식(이정하)을 만난 오미주(신세경)가 기선겸(임시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대목이 그렇다.
"우식씨가 하는 말은 이렇게 다 알아 듣겠는데 도대체 왜일까요? 두 시간짜리 외국어 번역보다 그 사람이 하는 우리 말 한 마디가 훨씬 더 어렵고 해석이 안 될 때가 많아요." 통번역이 일인 오미주는 자신과 기선겸과의 관계를 번역에 빗대 그렇게 표현한다. 어딘지 너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서 소통이 잘 안되는 기선겸이지만, 그래서 그런 어려운 번역을 맡을 때마다 더 소통에 대한 승부욕을 느끼는 오미주의 마음이 그 대사 안에 들어 있다.
역시 은퇴를 선언한 기선겸에게 운동선수들은 은퇴 후 무엇을 할까 궁금해하던 오미주가 그에게 하는 말도 예사롭지 않은 대사로 표현된다. "나는 미련처럼 애틋한 장르를 땔감으로 써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기선겸씨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빛나던 순간들에 대한 미련. 그 미련을 값지게 쓰는 것." 운동을 했던 그 순간들에 대한 미련들이 앞으로 그가 할 어떤 일에든 자양분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오미주는 그렇게 말한다.
감성적이고 재치 있는 대사도 눈에 띤다. 오미주와 박매이(이봉련)가 함께 사는 집에 잠시 기거하고 있는 기선겸에게 자신들이 일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운다며 자신들이 없는 동안 혼자서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하자 주인도 없는 집에 혼자 어떻게 편하게 있냐고 기선겸이 말하자 오미주는 이렇게 말한다. "어. 뭐야? 나 왜 지금 따끔했지? 방금 말을 좀 뾰족하게 했어요?"
어딘지 지독한 현실주의자처럼 보이던 서단아(최수영)가 이영화(강태오)를 찾아와 축구를 하는 이들을 보며 나누는 대화도 흥미롭다. 흘러온 공을 예사롭지 않게 차내자 축구를 좋아하냐고 묻는 이영화에게 서단아는 말한다. "그땐 축구선수가 꿈이었는데. 꿈은 꾸는 거지 이뤄지는 게 아니더라고. 뭐 그 정도에 꺾이는 꿈이었던 거지. 살다가 이렇게 한 번씩 마주치면 좋은 거구. 가끔 마주치려고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지만 늘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걸 본 이영화는 그가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걸 서단아와 이야기하고 있는 이영화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어떤 벽 하나가 허물어진 걸 느낀다. 늘 철벽을 치고 현실만을 말하는 서단아가 자신의 진짜 속내를 슬쩍 이야기한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속내도 드러낸다.
"제 꿈은 물어보지 마세요. 준비된 꿈이 없거든요.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 하기에도 바빠요. 아 최근에 하나 생겼다. 대표님이랑 그림 이야기 직접 하는 거? 누구 안통하고? 아니 꿈이 아니고 목표로 바꿀게요. 꿈은 아까 못 이룬다고 했으니까." 꿈이 아니라 목표로 바꾼다는 그 재치 있는 대사 속에는 이영화가 서단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감정이 묻어난다.
이처럼 박시현 작가가 <런 온>에서 쓰고 있는 대사들은 예사롭지 않다. "방금 말을 조금 뾰족하게 했어요?"라는 표현처럼 그는 말을 뾰족하게도, 둥글게도 할 수 있는 작가일 게다. 그래서 사실 그 대사의 말맛을 느껴가며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이런 톡톡 튀는 대사들은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든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기선겸과 오미주, 서단아와 이영화 같은 인물들의 매력이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대사들이 꺼내놓는 캐릭터의 감정적 질감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몰입도나 힘이 대사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매력적인 캐릭터만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런 온>에서 아쉬운 유일한 지점은 이런 대사가 주는 맛들이 좀 더 굵직한 극적 스토리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달하고 감성적이며 아픈 멜로만이 아니라, 좀 더 드라마가 하려는 분명한 스토리와 메시지가 더해졌다면 어땠을까. 달리기와 통역이라는 좋은 소재들을 늘 보던 클리셰적 설정들이 아닌 좀 더 색다른 이야기 속에서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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