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시민 미만의 존재

한겨레 2021. 1. 7. 14: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정규직 노동자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실패다. 대한민국의 법, 관행, 교육, 문화 모든 것이 노동자를 ‘시민 미만의 존재’로 만들어온 탓이다.

박권일ㅣ사회비평가

<경향신문>이 새해 벽두부터 훌륭한 기획기사를 썼다. ‘2020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심 판결 전수조사’다. 2020년 판결문에 나타난 산재 사망자는 총 185명이고, 176번의 사고로 176명이 죽었다. 법원이 185명의 산재 사망사고에 부과한 벌금은 총 16억800만원, 사망자 1인당 869만원이다. 도급액 2천억원 규모 건설현장인 경우, 노동자가 산재로 죽으면 시공사와 현장소장에게 각각 500만원 정도의 벌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사람 목숨값은 도급액의 2천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기업이라고 해서 사고가 나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값이 저 정도로 싸면, 기업은 사람 죽는 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산재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판결들은 비슷했다. 미미한 벌금과 가뿐한 처벌의 연속이다. 형량 1년 이상인 경우는 불과 20건, 그마저 대부분 집행유예다. 그런데 특이 사례 하나가 눈에 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최고 형량인 징역 3년이 선고된 사건이다. 2019년 철거작업 중이던 서울 가로수길 외벽이 무너져 1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했다. 철거업체 현장소장에게 법정 최고형인 3년형이 선고됐다. 기사는 이것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적었다. 실제로 이 판결 하나만 빼면 형량이 2년 이상인 경우도 거의 없다. 왜 이 사건만 달랐을까? 정답은 사망자의 ‘신분’이다. 3년형이 내려진 사건의 사망자는 길을 지나던 시민이었다. 나머지 대부분 사건의 사망자는 현장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죽은 사건에선 법정 구속된 경우조차 드물다.

이 차이를 설명할 논리가 없진 않다. 건설현장 같은 곳은 일상적 생활공간보다 위험한 게 사실이다. 일하는 사람 또한 주의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충분한 생명수당을 별도로 지급하지 않는 일이라면,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은 생활공간의 위험과 비교해 특별히 과도해선 안 될 것이다. 위험성이 크다면 그에 비례해 안전장치 또한 더 갖추어져야 하며, 그 책임은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쪽에 돌려져야 합당하다. 지금처럼 기업에 어떤 압박도 줄 수 없는 벌금과 처벌은, 결과적으로 주의 의무와 사고 책임을 피해자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자도 시민이고 같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그렇게 대우받지 못한다. 아파트 경비원은 입주민의 폭력에 시달리거나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듣는다. 환경미화원은 변기 옆에서 밥을 먹고 이주노동자는 영하 18도에 비닐하우스에서 죽어간다.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자는 육체노동자, 서비스 노동자, 비정규·불안정 노동자다. 물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아이디카드를 목에 건 채 초고층 빌딩을 오가는 정규직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노동자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이들은 훨씬 더 ‘공인된 노동자’인데, 왜냐하면 정규직 노동자일수록 노동조합원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권리를 가장 잘 보장받는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도 노동자 아니냐”고 하면 표정이 일그러지기 일쑤다. 수년 전 어느 진보정당 당원들이 당명 제정을 앞두고 “‘노동’이란 단어로 통합에 재 뿌리지 말라”고 적은 카드를 내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과 ‘노동자’라는 말이 어떻게 통용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규직 노동자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실패다. 대한민국의 법, 관행, 교육, 문화 모든 것이 노동자를 ‘시민 미만의 존재’로 만들어온 탓이다.

2021년 1월 초, 기존 산안법을 보완해줄 거라 기대됐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됐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행복한 오멜라스 시민들을 떠올렸다. 어슐라 르귄의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나온 도시 오멜라스는 한 아이가 끔찍한 고통을 겪는 대가로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곳이다. 도시의 비밀을 알고 그 부조리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둘 오멜라스를 떠나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진실을 알면서도 오멜라스의 안온한 삶을 만끽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고통은 감수할 만하다’는 것이겠다. 그러나 한 사회의 진면목은 가장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고통받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당신은 떠나는 쪽인가, 남는 쪽인가? 나는 바꾸는 쪽을 택하겠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