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살아남자"는 말이 위로가 될 때[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1. 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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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너도 너무 친절해서 나중에 네가 많이 아플 수 있어.”

데뷔 3년차 츄에게 데뷔 14년차 선미가 말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극한의 경쟁 속에서, 따뜻하고 재능 있는 후배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후배의 모습에서 선배는 “사랑을 주는 만큼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옭아맸던 자신을 떠올렸다. 선배는 후배를 위해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기꺼이 내보이고,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상처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말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지난달 31일 전화로 만난 엠넷 <달리는 사이> 박소정 PD는 “방송을 보고 ‘‘함께 울었다’ ‘위로받았다’는 반응이 유독 많았다. 출연자들과 제작진의 진심이 시청자들에게도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기분”이라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달리는 사이>는 K팝을 대표하는 여성 아이돌(선미, 하니, 청하, 오마이걸 유아, 이달의소녀 츄)이 국내의 아름다운 러닝코스를 달리는 4부작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지난달 30일 종영했다.

엠넷의 4부작 리얼리티 프로그램 <달리는 사이>에 출연한 오마이걸 유아와 이달의소녀 츄, 하니(위 왼쪽부터), 청하와 선미(아래 왼쪽부터)는 “괜찮다”는 말 뒤에 숨겨진 극한의 경쟁, 각자를 괴롭혔던 상처를 드러내며 서로를 위로한다. 엠넷 제공, 그래픽|이아름 기자

‘달리기를 통해 삶을 되돌아본다’는 기획 의도는 박 PD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다. 직장생활이 힘에 부쳤을 때 처음 시작한 달리기는 그에게 ‘치유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달리기가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전력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게을러지기도 하거든요.”

전작 <비밀언니>를 통해 여성 연예인들이 서로 돕는 서사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그는 “달리기를 통해 느낀 이 다양한 감정들을 그동안 쉼없이 ‘달려온’ 여성 연예인들과 나눠보고 싶었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처음 기획한 2019년 말은 여성 연예인들의 안 좋은 소식이 연달아 들리던 시기였어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어요.”

“멈추면 그냥 그 경기에서 퇴장해야 할 것 같았다”(청하), “방송에 나가면 나갈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츄), “내가 남 앞에 서서 뭔가를 하는 게 다 잘못된 건가 생각했다”(유아)…. 어렵사리 꺼내놓은 이들의 우울엔 닮은 점이 많다. 이는 남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 스스로를 입증해야 했던 ‘여성 아이돌’의 고충인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분투하는 ‘청년’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 앞에 서서 뭔가를 하는 게 다 잘못된 건가 생각했다”는 오마이걸 유아는 <달리는 사이> 출연을 통해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다른 출연자들에게도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 그 이상의 의미였다. “숨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청하),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유아), “한 인간으로 마음껏 살아있을 수 있었다”(하니)는 출연자들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엠넷 제공


“이 친구들의 이야기가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이야기로 느껴지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제작진 사이에 있었어요. 20대 연예인이기 이전에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시청자들이 ‘내 이야기’처럼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편집의 주안점을 뒀어요.”

2화 방송 직후엔 선미의 ‘경계선 인격장애’ 고백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변 PD들로부터 “사전에 미리 조율한 것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박 PD는 “출연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도록 제작진의 개입은 최소화했다”고 말했다. <달리는 사이>는 거치식 카메라와 원거리 촬영을 활용해 스태프 인원을 최소로 유지했다.

“현장에서 이 친구들의 대화를 들었을 때,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쏟아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방송을 했고, 얼마나 많은 기회가 있었겠어요. 그런데도 이 정도까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제작진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하니는 ‘인간 안희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촬영장을 찾았다. 그런 하니의 모습을 지켜본 청하도 첫 만남 직후 화장을 지우기 시작한다. 박 PD는 이 장면을 두고 “마음을 열고 진솔하게 이야기하겠다는 일종의 ‘시그널’로 느껴졌다”고 했다.

지난달 종영한 4부작 리얼리티 프로그램 <달리는 사이>를 연출한 박소정 PD는 다섯 명의 출연진을 통해 20대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청자들이 ‘내 이야기’처럼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편집의 주안점을 뒀어요.” 엠넷 제공

“방송에 나간 대화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을 만큼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도 많이 오갔어요. 출연자들이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 만큼, 최대한 이들의 진심을 왜곡하지 않고 전달하고 싶었죠. 처음 선미의 경계선 인격장애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방송에 못 내겠다’고 판단했지만 선미가 ‘이제는 이겨냈기에 공개해도 괜찮다’고 말해줘 방송에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는 마지막 회 달리기 장면을 꼽았다.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싶다는 츄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고 달리면서 벅찬 행복감을 느끼고,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던 유아는 청하와 함께 보폭을 맞추며 다시금 힘을 낸다. 박 PD는 “달리기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방송 전까지도 고민이 많았다”며 “목표 지점에 도착한 이들이 서로를 안아주는 모습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부터 가장 담고 싶었던 장면”이라고 했다.

<달리는 사이>는 출연자들에게 단순한 예능 프로그램 그 이상의 의미였다. “숨쉴 수 있는 순간이었다”(청하),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유아), “한 인간으로 마음껏 살아있을 수 있었다”(하니)는 출연자들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박PD는 “제작자 입장에선 ‘진심을 드러내도 이를 왜곡하지 않고 포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작은 확신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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