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유통업계 최초 '여성 CEO' 임일순, 홈플러스 떠난다
7일 퇴임 발표, 사업계획확정일인 이달 중순 '평범한 고객'으로
홈플러스 "갑작스러운 소식, 사업부문장 공동체제로 경영공백 없다"
유통업계 최초 '주부 CEO', 계약직 정규직 전환도 처음
온라인 1조 매출 달성, 온오프라인 통합 초석 마련 평가
대형마트 규제, 노조 정치권 압박에 '번아웃' 얘기도
임일순 홈플러스 대표가 퇴임한다. 글로벌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홈플러스의 ‘구원 투수’로 선임한 지 3년3개월만이다. 온라인 판매액 1조원 돌파를 이끄는 등 온·오프라인 통합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 만큼 또 다른 도약을 위해 ‘바통’을 넘겨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7일 유통 및 IB업계에 따르면 임 대표는 이날 오전 임원회의에서 사임 의사를 발표했다. 주주사인 MBK파트너스와도 최종 협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퇴임일은 2021회계연도(2021년 3월~2022년 2월) 사업전략에 대한 최종승인일인 이달 중순 경이 될 전망이다.
임 대표는 약 3개월 전부터 MBK파트너스에 사의 의사를 표명해왔다. 사유에 대해선 임 대표가 “개인적인 사유”라고만 밝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 대표는 임원회의에서 퇴임 사실을 밝히며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에 떠나게 되어 임직원과 주주사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남은 임직원분들께서 홈플러스가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올라인 전략을 지속적으로 잘 수행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MBK측은 코스트코코리아 CFO(최고재무책임자) 출신인 임 대표의 전문성에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온 터라 사표를 줄곧 반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2021년 경영계획을 위한 임원 회의를 진행했다”며 “워낙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후임 대표가 정해질 때까지 홈플러스는 당분간 사업부문장들이 공동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IB업계 관계자는 “MBK파트너스가 임 대표의 후임을 급하게 수소문하고 있다”며 “유통과 재무 경험이 풍부한 임 대표만한 인물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퇴임이 결정되면서 ‘주부 CEO’로 주목 받아 온 임 대표는 평범한 마트 고객으로 돌아간다.
임 대표는 2015년 11월 재무부문장(CFO, 부사장)으로 홈플러스와 인연을 맺었다. 2년 뒤인 2017년 5월 경영지원부문장(COO, 수석부사장)을 거쳐 같은해 10월 대표이사 사장(CEO)으로 승진했다.
그에게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임 대표는 국내 대형마트 업계를 포함해 유통업계 최초의 여성 CEO다. 오너가(家)를 제외한 인물 중 처음으로 ‘유리천장’을 깬 주인공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19년엔 무기계약직 직원 약 1만5000명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현재 홈플러스는 전체 임직원 중 99%가 정규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임 대표의 결정은 대형마트 업계 내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이 많았다. 별도의 자회사를 설립해 계약직 직원을 배치하거나, 별도 직군을 신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홈플러스의 전체 임직원 2만3000여 명 중 정규직 비중은 무려 99%(2만2900명)에 달한다.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임 사장은 3년3개월의 CEO 재임기간 동안 오프라인 대형마트 중심의 홈플러스를 온라인과 융합된 ‘올라인(All-Line) 미래유통기업’으로 전환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창고형할인점과 대형마트의 장점을 결합한 효율화 모델 ‘홈플러스 스페셜’ 점포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 특히 오프라인 전 점포를 온라인 물류거점으로 전략화하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 대표는 미래 유통기업으로의 체질 개선에도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업 지배구조 및 윤리적 준거 지표를 끌어올려 이전과 달리 사업 투명성을 확보했다.
일각에선 임 대표가 대형마트를 둘러싼 녹록치 않은 환경이 사의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얘기도 나온다. 홈플러스는 2019 회계연도에 당기 순손실 5322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2016년 3209억원에서 2018년 1091억원으로 줄었다.
임 대표는 대형마트에 대한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규제 환경에 안타까움을 호소해왔다. 임 대표는 “대형마트를 비롯해 유통업계가 살기 위해선 데이터에 기반한 제품 소싱, 재고 관리, 물류 처리 등이 필수”라고 말하곤 했다. 홈플러스가 점포 일부 공간을 물류 시설로 전환하면서 알고리즘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홈플러스를 비롯해 국내 대형마트들은 밤 12시 이후로는 영업을 금지하는 유통산업발전법에 묶여 있다. 쿠팡, 마켓컬리 등 온라인 경쟁자들과 달리 새벽배송을 아예 할 수 없다는 얘기다.
홈플러스는 점포 구조조정에도 애를 먹고 있다. 임 대표는 글로벌 기업의 CFO 출신이란 경력을 살려 2019년 홈플러스 전국의 매장을 리츠(REITs, 부동산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뮤츄얼펀드) 상품으로 만들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노조와 정치권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미국, 유럽 등으로 투자 설명회를 나갔을 때 글로벌 투자자들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홈플러스 점포를 복합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며 “이 아이디어가 성공했더라면 국내 투자자들에게도 수익률 높은 부동산 상품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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