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한(恨) 맺힌 노래'

김석 2021. 1.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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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에 붙잡혀 머나먼 타향으로 끌려간 조선의 백성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못 잊어 한숨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사람들. 바다 건너 저 멀리 고국을 그리며 목놓아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1980년 일본 교토대학으로 유학 간 국내의 저명한 국어학자가 우연히 발견한 필사본 한 권. 표지에 적힌 제목은 <조선가(朝鮮歌)>였습니다.

일본 교토대학 소장 <조선가>의 표지 (출처: 정광 《조선가》에서 재인용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납치돼 끌려간, 도공(陶工)이라 불린 도자기 장인들의 수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도자기전쟁’이라는 수식어답게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 왜군은 솜씨 좋은 조선의 도자기 장인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일본으로 데려가죠. 찻잔 하나가 성 한 채 가격에 맞먹는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하고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조선의 막사발을 향한 일본인들의 열망과 집착이 그만큼 컸던 겁니다.

낯선 나라에 끌려가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을 조선 백성들의 천신만고가 쉬이 헤아려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눈물을 흘렸을까. 고향을, 가족을, 조국을 잊지 않기 위해 조선 사람들은 노래했습니다. 위 가사에 보듯 내일도 모레도 그저 오늘만 같았으면 하는 마음을 노래했죠. 그들은 왜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


<조선가>의 2연입니다. 어떤 구절은 현대 우리말로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습니다. 다만, 첫머리에 인용한 1연에 이어 지금의 어떤 상황을 충분히 즐기자는 의미만큼은 충분히 읽어낼 수 있죠. 어째서 일본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은 오늘이 내일 같기를 바라고, 이렇게 저렇게 놀며 즐기자고 노래했을까. 1980년에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의 서고에서 <조선가>를 발견한 원로 국어학자 정광 교수는 이 곡의 유래를 당시 조선에서 널리 불렸던 노래에서 찾았습니다.


<조선가>의 1연과 가사가 거의 똑같습니다. 정광 교수는 이 노래가 임진왜란 당시 남원으로 피신해 있던 거문고 명인 양덕수(梁德壽)가 펴낸 거문고 악보집 《양금신보(梁琴新譜)》에 수록된 점 등을 근거로 남원 지역을 침공한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에 끌려간 이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른 노래라고 결론짓습니다. 그 노래가 후손들에게 면면히 전해져 대대로 불렸다는 거죠.


전쟁 없는 평화로운 나날들을 꿈꾸며 그들은 고향을 노래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 자연히 고향 마을의 산과 들과 냇물과 사람들이 떠올랐겠죠. 속절없이 다른 나라에 끌려와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간 이들에게 고향의 노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었을 겁니다. 노래가 가진 힘이겠죠. <조선가>를 발굴한 정광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란에 희생되어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들에게는 정말로 가슴에 와 닿는 가사로서 평화를 기원하고 전쟁을 혐오하는 반전(反戰)의 노래였을 것이다.”

<한글묵서 다완>, 일본 에도시대, 분청, 높이 10.6cm, 입지름 13cm, 받침지름 6.4cm, 국립중앙박물관


저자가 <조선가>를 일본에서 발견한 지 40년이 지난 뒤에야 《조선가, 일본에 울려 퍼진 조선 도공의 망향가》(김영사, 2020)를 국내에서 출간한 점은 의아합니다. 왜 굳이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필요했는지는 책에 상세하게 밝혀놓았으니 굳이 이 자리에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일본의 기록이 충실하게 남아 있었기에 <조선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합니다.

책을 읽다가 저자가 소개한 아주 특별한 유물을 만났습니다. 2017년 일본 교토의 고미술 수집가 후지이 다키아키(藤井孝昭)의 유족이 한국에 기증한 찻잔입니다. 이 찻잔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표면에 새겨진 한글입니다. 기증 당시 저자가 의뢰받아 해독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 모두 도둑인가?
자목지 호고려님이
계신 곳을 다녀오련다.
그 개도 호고려의 개로구나.
듣고 잠잠 하노라.

두 구절씩 묶어 읽으면 한 편의 시조와 같은 형식을 띱니다. 워낙 오래전 글씨라 무슨 내용인지 선뜻 다가오지는 않죠. 저자는 일본에 납치된 조선인들의 설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밤에만 돌아다닐 수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넋두리하듯 썼다는 겁니다. 일본인들은 당시 조선을 ‘고려’로, 조선인을 ‘고려인’으로 주로 불렀는데, 앞에 붙은 호(胡)는 오랑캐라는 비하의 뜻이 담긴 표현입니다.

남의 나라에서 얼마나 괄시를 받았으면 찻잔에 굳이 이런 내용을 적어넣었을까요.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남의 땅에서 달리 하소연할 곳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이고 쌓인 울분을 모아 찻잔에 써넣었겠죠. 그리고 노래했을 거고요. 납치된 조선인들이 부른 <조선가>. 전쟁이 낳은 또 다른 깊은 상처였습니다.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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