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설강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2021. 1. 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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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루페와 현미경이 돼 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을 세밀히 탐구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길가에 보이는 식물을 훑어 보는 것으로 식물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좀더 멀리 있는 수목원과 근교의 산을 갔다가, 훗날엔 더 깊은 숲을 향한다. 처음에 흥미를 느낀 건 식물계 전부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합목, 수선화과, 갈란투스속까지 더 작고 세밀한 장르, 자신의 구체적인 식물 취향을 향해 간다.

갈란투스속 중 대표종인 니발리스종. 한겨울에 새하얀 꽃을 피우는 겨울꽃 식물이며, 설강화, 스노드롭, 갈란투스 등으로 불린다.

이맘때면 식물 애호가 중 갈란토필 또는 갈란토마니아라고 불리는 갈란투스 애호가이자 수집가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열정적인 갈란투스 애호가 E A 볼스가 ‘갈란토필’이란 용어를 처음 쓴 것으로 추정된다. 갈란투스란 스노드롭의 속명으로, 설강화라고도 불리는 새하얀 꽃잎의 겨울 꽃이다.

설강화는 빠르면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꽃을 피우지만 제철은 1월과 2월이다. 바로 지금부터 설강화 생체를 사려는 애호가에 의해 원예시장이 휘청인다. 이들 사이에서 1~2월 카드값은 파멸의 길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설강화가 시들기 시작하는 3월이 되면 카드값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내가 설강화를 유난히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애호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매일 외국 경매 사이트에서 식물세밀화가 그려진 식물 고서를 찾아다니는 식물 고서 애호가이기 때문이다. 설강화 애호가는 식물 생체를 원하고, 나는 그림을 원한다는 차이뿐이다.

설강화는 그 어떤 식물보다 앙증맞고 귀엽고 투명하게 빛난다. 이들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면서도 유독 이 식물에 광기 어린 애정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늘 신기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세상에 설강화만큼 아름다운 식물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강화와 그 애호가를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이제 그들의 사랑의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설강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한겨울에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황량한 겨울 숲에 마음이 건조했던 사람들의 기대감 속에 꽃이 피어난다. 흰 눈밭을 뚫고 녹색 줄기와 방울 모양 꽃을 내놓는다는 건 우리에게 어떤 희망과 긍정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갈란투스란 속명 역시 흰 우유를 의미하는 ‘갈라’에서 유래했다. 지난해 2월 교토부립식물원과 그 전해 겨울 영국 첼시피직가든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설강화 밭이었다. 겨울 그 어떤 식물 장소를 가도 이들의 개화는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받는 장면이다. 물론 설강화만이 겨울에 꽃을 피우는 건 아니다. 복수초와 시클라멘, 크로커스 등도 있는데, 유독 사람들이 설강화에 눈길을 돌리는 건 이 식물이 유난히 작고, 종마다의 형태적 차이가 아주 세밀하다는 것에 있다.

2015년 경매 사이트에서 1390파운드(약 205만원)에 판매된 설강화. ‘웬디스 골드’라고 불리는 품종으로, 노란색 희귀종이다.

원예가 찰스 크리슨은 정원에 대해 말하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큰 식물이 아무리 인상적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비로소 가치를 갖는 건 곳곳에 있는 작은 식물들이라는 것이다. 설강화는 유난히 작고, 종의 형태 차이가 세밀하다. 흰 꽃잎의 녹색 음영이 나 있는 정도가 종을 식별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애호가들은 이 작은 차이를 식별하고, 자신들이 식별한 다양한 종을 소유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 눈에 모두 같은 종으로 보이지만 나만이 이들의 다양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다른 식물 애호가들과는 다른 우월감과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강화는 원종 20종에서 2000종 이상의 품종이 육성됐다. 애호가들은 육성된 품종에 꾸준히 이야기를 담아 왔다. 이 이야기 역시 후대의 사람들이 설강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2015년 한 경매 사이트에서 설강화 생체가 1390파운드(약 205만원)에 판매됐다. 이 품종은 ‘웬디스 골드’라고 하는 노란색 희귀종이었고, 누군가는 여기에 1000파운드 이상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작디작은 알뿌리 하나가 고액에 거래된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듯 사람들은 설강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설강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각국의 대표 식물원에서는 2월이 되면 설강화 축제를 자주 연다. 물론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축제를 열지 않는 곳이 상당하다. 게다가 설강화 애호가들은 야생 원종의 보존과 대중화에 꾸준히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식물의 미래는 그들을 좋아하는 인류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믿는다. 작디작은 설강화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갈란토필과 갈란토마니아처럼 우리 주변의 식물의 운명 역시 식물을 좋아해 이 글을 읽는 우리 손에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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