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명이 환자 돌보다 감염.. 완치후 또 환자 곁으로 갔다

이준우 기자 2021. 1. 7.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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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년, 우린 더 강해진다] [끝]

전주 대자인병원의 수간호사 강정화(52)씨는 냄새를 잘 맡지 못하고 맛도 잘 느끼지 못한다. 코로나 감염 후유증으로 후각과 미각 기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밥이나 찌개를 만들 때 자주 태워 가족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고 한다. 20년째 간호사로 일하는 그는 지난 3월부터 6주간 대구 영남대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대구에서 하루 300명 넘는 확진자가 나오던 때, “운전대를 잡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대구로 향했다”고 한다.

지난 1년 의료진의 땀과 눈물이 없었더라면 코로나 사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곁을 지키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명제 인천 국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 이민화 서울시립동부병원 수간호사, 서명옥 서울 강남하트스캔검진센터 부원장, 최민경 인천 가천대길병원 응급실 간호사. /박상훈·장련성 기자, 가천대길병원 제공

“한 번쯤은 오로지 타인을 위한 의료 봉사를 해보고 싶었어요.” 강 수간호사의 오랜 소망은 실현됐다. 그러나 대가는 작지 않았다.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코로나 환자를 도왔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감염자가 된 것. 음압병실에 격리되자 ‘동료들에게 폐를 끼친 게 아닐까’ ‘의료진이 감염된 걸 알면 환자들이 얼마나 불안할까’ 걱정과 후회가 밀려오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코로나 감염자가 되어 보니 그간 환자들이 얼마나 병실에서 외롭고 무서웠을지 새삼 알겠더라고요.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환자들에게 무심한 적이 없었나 다시 돌아보게 됐어요.” 코와 혀 기능은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대자인병원에서 코로나 중환자실 병상 준비 과정을 돕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진행형이다. 그러나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 지난 1년 의료진의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그 파장은 더 심각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의료 현장을 지키며 고군분투한 의료진이 소중한 이유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의사 10명, 간호사 101명, 간호조무사 33명이 강씨처럼 환자를 돌보다 코로나에 감염됐다. 그러나 의료진의 분투는 그칠 줄 모른다. 최근 3차 대유행에서 의사 1205명, 간호사 5264명이 봉사를 자청해 현장을 누비고 있다.

수간호사 이민화(53)씨는 서울시립동부병원에서 일한다. 지난달 초 동부병원이 코로나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자 어린 자녀를 둔 간호사 일부는 병원을 떠났다. 감염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이씨는 남았다.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때도 응급실을 지켰던 그였다. 이씨는 “코로나 초기엔 몇 달만 고생하면 해결될 줄 알았다”며 “이젠 코로나가 바로 옆까지 왔다는 위기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환자 가족들이 매일 전달하는 수십 박스 택배 상자를 나르는 일도 간호사들 몫이다. 그는 “간혹 담배나 칼 같은 반입 금지 물품을 보내는 분이 있어 잘 살펴야 한다”면서 “가족인데도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박스에 담긴 듯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인천 가천대길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간호사 최민경(41)씨는 1년째 하루 8시간씩 응급실을 지킨다. 병원 밖 컨테이너 박스에 마련된 사전 선별 분류소에서 코로나 감염자를 걸러내는 ‘수문장’ 역할도 한다. 가운·모자·페이스실드·마스크·장갑을 갖춰 입어도 살을 에는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코로나로 숨진 환자를 사체 백에 옮길 때마다 온몸의 힘이 빠진다”는 최 간호사는 “우리를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이웃들이 큰 힘”이라고 했다.

인천 국제성모병원 응급실 의사 송명제(33)씨는 경기 안성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다가 전역 한 달 전인 지난해 3월 대구로 향했다. 동료들이 “그러다 코로나에 걸리면 전역 후 병원에 취직이나 할 수 있겠냐”고 말렸지만 뜻을 접지 않았다. 2주 예정한 봉사 시간을 3주로 늘리면서 대구 1 생활치료센터에서 코로나 확진자 230명을 돌봤다. 아침부터 밤까지 5분 대기조로 코로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였다. 그는 “우리는 반드시 코로나를 이겨낼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보훈요양병원 간호사 박명희(45)씨는 지난 3월 대구에서 의료 봉사 후 자가 격리를 하느라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국공립기관 간호사 동료들이 모두 대구로 가는데 혼자만 빠질 수 없다는 각오였다. 심장 질환을 앓던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말없이 떠났다. 매일 환자들 용변과 기저귀 등을 처리하면서 정신없을 당시, 어머니로부터 전화 다섯 통이 걸려왔지만 받지 못했다. 봉사 후 자가 격리 첫날, 어머니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의 휴대폰엔 받지 못한 어머니 발신 전화 번호가 남아 있다. 박씨는 “코로나로 가족을 잃고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환자들 심정을 알 것 같다”고 했다.

서명옥 서울 강남하트스캔 검진센터 부원장(60)은 주말마다 송파구 치료센터로 달려가 확진자를 돌보고 있다. 대구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의료인 중 한 명이다. 그는 “메르스 사태 때 강남구 보건소장으로 일하며 감염병의 무서움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 역시 지난해 2월 대구행 KTX 열차표를 미리 끊어놓고 출발 당일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대구로 향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어딜 가느냐”며 딸이 말렸지만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체질”이라며 뿌리쳤다. 서 부원장은 “감염병은 예방이 최우선”이라면서 “전문가 양성, 방역 시스템 확충 등에 정부 예산을 더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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