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프리즘] 슈뢰딩거의 정책

남상훈 입력 2021. 1. 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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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R&D 수십조 투자에도
기술혁신 수준 여전히 낮아
효과 없는 정책 과감히 없애고
겉치레보다 내실에 신경 써야

1935년 슈뢰딩거는 입자의 상태를 확률로 표현하는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고자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고실험을 제안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완전히 밀폐되고 불투명하여 내부를 관찰할 수 없는 상자 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가 담긴 병이 있다. 청산가리 병 위에는 망치가 있고 망치는 방사선을 감지하는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상자 안에 1시간에 50%의 확률로 붕괴하는 우라늄 입자가 놓여 있다면 1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가 살았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우리가 사는 거시세계의 관점에서는 고양이가 살거나 죽거나 하는 이분법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입자의 상태가 확률로 표시되는 양자역학적 관점에서는 상자 안의 고양이가 1시간 뒤 50%의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고, 50%의 확률로 죽었을 수도 있다. 즉, 고양이의 생사를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상태를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처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은 양자역학 같은 미시세계에서만 일어나야 정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정책에서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한 해 약 7만개의 국가 R&D과제 중 98%가 성공판정을 받고 있으나 기업들은 사업화할 만한 우수한 기술이 부족하다고 한다. 작년 한 해 중소기업 전용 R&D로 2조2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여전히 중소기업의 기술혁신 수준은 낮은 편이다. 제4차 산업혁명 선도를 위해 정부가 디지털 뉴딜에 약 45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디지털 뉴딜 전략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 기업은 4.8%에 불과하다. 규제 샌드박스 법령만 5개가 존재하며 부처별로 경쟁적으로 규제 자유구역 특구를 설치하고 있으나 막상 현장에서는 규제 때문에 혁신을 못 하겠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혁신정책이 양자 수준의 미시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이론적으로는 공격적인 투자와 물샐틈없는 지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현장에서는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상반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거시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책일 텐데 잘되는 것도 아니고 안되는 것도 아니니 슈뢰딩거가 놀랄 일이다.
안준모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기술경영
2021년 정부 R&D예산은 27조4000억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작년보다 무려 13.1% 증가했다. 이처럼 투자 규모가 무섭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기술혁신이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새로운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효과가 없는 기존 정책을 과감히 폐기하는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공공부문의 기관장 임기가 짧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신임 장관이나 기관장들은 임기 내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고 충분한 고민 없이 정책을 성급히 만든 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졸속 정책들이 상호 간섭을 하면서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의 다이어트가 시급하다. 둘째, 한국형 모델이 필요하다. 홈쇼핑에서 모델들이 입었을 때 멋져 보이는 옷도 막상 주문해서 수선 없이 입어보면 품이나 길이가 안 맞아 맵시가 안 날 경우가 많다. 옷도 맞춤이 필요한데 해외사례의 경우 오죽하랴? 국내 정서와 문화에 맞는 최적화를 바탕으로 우리 환경에 맞는 오리지널 정책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겉치레보다 실질적 내실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느라 꼭 필요한 인재를 놓치거나 감사에 대한 구색을 갖추고 증빙서류를 준비하느라 연구가 뒷전이 되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2021년 신축년 소띠해는 여유와 평화의 해라고 한다. R&D 100조 시대를 맞아 여유로운 재원만큼 성숙한 정책이 추진되기를 기대해 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의 사례로 충분하다.

안준모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기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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