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레깅스 촬영은 유죄"..성적 대상화 안될 자유 첫 인정

장예지 2021. 1. 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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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유죄→2심 무죄 엇갈렸지만
대법, 2심 판결 파기환송
피해자 '성적 수치심' 의미도 확장
대법원. 한겨레 자료사진

레깅스 촬영 사건의 대법원 판단은 유죄였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불법촬영 범죄에서 자신의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성적 자유’의 의미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불법촬영(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ㄱ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사건의 쟁점은 해당 촬영물이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를 찍은 것인지였다. ㄱ씨는 2018년 5월 버스에서 운동복 아래 레깅스를 입고 있던 피해자의 엉덩위 등 하반신을 약 8초간 몰래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ㄱ씨에게 적용된 ‘카메라등이용촬영죄’는 피해자의 성적 자유와 함부로 촬영당하지 않을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법원은 이를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했다. 이에 대해 1심은 ㄱ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지만 2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레깅스 촬영물, 성적 수치심 유발 안 돼” 무죄 선고

항소심은 ㄱ씨가 피해자를 몰래 촬영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촬영된 신체 부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레깅스는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고 피해자도 같은 옷차림으로 대중교통에 탑승했다”며 “레깅스를 입은 젋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레깅스를 입고 공공장소에 나왔고, 촬영물도 특정 부위를 강조하거나 특별한 각도로 찍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카메라등이용촬영죄’에서 말하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피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기분이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도 진술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불쾌감이나 불안을 넘어선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표현으로도 보지 않았다.

대법원 “자기 의사 반한 불법촬영…성적 수치심 유발”

그러나 대법원은 “불법촬영의 대상이 되는 신체는 반드시 노출된 부분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복이 몸에 밀착해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의 굴곡이 드러나는 경우도 해당한다”며 유죄 취지로 선고했다. 2심은 레깅스가 일상복이 됐고 피해자가 레깅스를 입고 나온 점 등을 무죄 근거로 삼았지만 대법원은 이를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거나 편의를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 해도 이를 본인의 뜻에 반해 함부로 촬영 당했다면 성적 수치심이 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같은 판단은 대법원이 불법촬영죄가 보호하는 ‘성적 자유’의 의미를 최초로 판시한 것으로, 누구나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의의가 있다. 대법원은 “통상적으로 시야에 드러나는 신체 부분은 일정 시간 동안만 관찰이 가능하고, 관찰자의 기억에도 한계가 있지만 그 모습이 촬영되면 고정성과 확대 등 변형가능성, 전파가능성에 의해 인격권까지 중대하게 침해할 수 있다”며 피해자가 촬영을 당한 맥락과 촬영 결과물, 피해자의 반응을 모두 종합했을 때 ㄱ씨 혐의가 인정된다고 본 것이다.

‘성적 수치심’ 넘은 피해자의 ‘성적 빡치심’…대법 “다양한 피해감정 포괄해야”

대법원은 피해자가 느낄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 뿐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피해 감정을 포함한다”며 피해자의 다양한 피해 감정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성적 수치심의 의미도 보다 확장했다.

2심은 피해자가 경찰에서 “기분이 더럽다”고 한 표현 등은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게 아니라고 봤지만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은 피해자의 성적 모멸감, 함부로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됐다는 분노와 수치심의 표현”이 맞다고 인정했다. 단순한 부끄러움이나 불쾌감을 넘어 피해자가 인격적 존재로서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느끼는 등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폭넓게 이해한 것이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이 느낄 다양한 피해감정에 대한 예시로 <한겨레> 기사 “성적 수치심, 안느꼈는데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도 소개했다. 대법원이 “성적 수치심 관련 논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라고 밝힌 이 기사에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성적 수치심 외에도 분노와 두려움, 공포 등 다양한 피해 감정이 들 수 있다며 복합적이고 다양한 피해감정을 포괄할 새로운 표현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성범죄 전담 국선 변호사인 신진희 변호사는 “불법촬영 사건에서 피해자가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권리를 강조한 것이 중요하다”며 “피해자의 관점을 중시하기 시작한 성범죄 판결 흐름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은 “피해자가 다양하게 느낄 성적 수치심의 느낌을 하나로 재단하지 않고 복합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레깅스 불법촬영’ 사건으로 회자된 이 사건은 당시 항소심 재판부가 판결문에 피해 사진을 첨부해 논란이 더욱 커졌다.(관련기사▶[단독] “레깅스 불법촬영 무죄” 법원, 판결문에 피해 여성 사진 실었다) 피해자 동의 없이 촬영된 사진을 판결문에 남겨 피해자의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법관으로 이뤄진 젠더법연구회에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등 법원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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