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 이름은 지웠지만 '순이의 눈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2021. 1. 6.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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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역사도보투어 코스

[경향신문]

가산동과 독산동을 연결하는 ‘금천구 역사도보투어’ 길은 노동 투쟁의 현장과 신구 양식의 건축물을 아울러 볼 수 있다. 이 길에서 ‘구로공단의 노동 문제’는 디지털이나 밸리란 이름이 붙은 뒤에도 소멸되지 않았다. 사진은 독산역 금산고가차도 인도에서 가산디지털역 쪽으로 바라본 단지 일대다. 왼쪽엔 신축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섰다. 오른쪽엔 경부선 철길 담벼락을 따라 벚나무길이 이어진다.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생활상과
산업 발전 역사를 확인하는 코스
노동자들이 투쟁하던 장소들엔
오피스텔·아웃렛 등이 들어서
첨단 건물과 ‘G밸리’란 이름으로
‘누이들의 피눈물’을 가렸지만
구로공단의 역사는 곳곳서 되풀이
‘유산·유적’으로 박제할 수 있을까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 오르고/ 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 오른다/ 바람은 어두워 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김민기가 짓고, 송창식이 부른 ‘강변에서’(1973) 가사다.이어지는 가사에 나오는 ‘높다란 철교’나 ‘작은 나룻배’ 같은 구절이나 나룻배가 1978년까지 한강을 다닌 점 등을 고려하면, 누군가가 한강철교 북단 강가 어디에선가 철야하는 구로공단(정식 명칭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노동자 ‘순이’를 기다리며 읊는 감상인 듯하다. 김민기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 중 동명의 노래 화자도 ‘순이’로 했다. 심상정은 구로공단 노동자로 일할 때 홀로 언덕에 올라 ‘공장의 불빛’을 부르곤 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금천구 ‘구로공단 노동자체험생활관’(이하 생활관)을 찾았을 때 ‘강변에서’가 떠올랐다. 생활관 애칭이 ‘금천 순이의 집’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애칭을 붙였을까. 생활관 이효정 주무관은 “2013년 생활관에 친근한 느낌을 주려고 주민 공모로 이름을 정했다”고 말했다. 당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가 ‘순이’였다.

쪽방을 재현한 노동자체험생활관(순이의 집) ‘희망의 방’(온라인 전시관 화면 갈무리)

■과거의 유산?

국가와 자본은 이들 순이를 ‘수출의 여인’ ‘산업역군’으로 치켜세웠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이곳을 종종 찾았다. 한편으로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착취했다.

1985년 경향신문 한 기자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야근 중인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취재했다. “2년 만기 10만원짜리 적금을 붓고 있다”는 노동자의 말을 듣고 이 기자는 이렇게 되물었다. “100만원이라고요?”

1982년 구로구청 조사를 보면, 구로공단 1단지의 배후지이자 2·3단지를 둔 가리봉동(가산동의 옛 지명) 다세대주택 방세는 5만원이다. 숙련공 월급(48시간 잔업과 2일 철야 포함)이 5만8000원일 때다. 여러 명이 방세를 아끼려 방 하나를 나눠 썼다. ‘벌집’이라 불렀다. 체험관은 이들 여성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쪽방과 미니어처로 재현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라보때(라면으로 보통 때운다)’라 불렀는데, 체험관 ‘가리봉상회’ 진열장엔 1986년 출시된 신라면 박스가 놓여 있다.

체험관은 두루누비(durunubi.kr)가 지난달 등록한 ‘금천구 역사도보투어’ 첫 목적지다. 1·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에서 건널목을 건너 벚꽃로를 따라 150m쯤 올라 오른편 골목으로 꺾으면 나온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임시 휴관 중이다. 체험관은 홈페이지(gchistory.kr)에서 VR 온라인 전시관을 운영한다.

두루누비는 가산동과 독산동을 잇는 3.6㎞의 길을 “1990년대 이전 한국 산업을 발전시킨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생활과 공장 건물, 산업 발전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한다. 체험관 입구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임을 알리는 동판이 걸렸다.

‘유산’이나 ‘유적’으로 박제할 수 있을까. 이 ‘코스’에서 지나간 역사, 감상에 젖은 회고가 아니라 진행형의 사건을 확인한다. 쪽방에서 지난달 20일 난방 끊긴 비닐하우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캄보디아인 이주노동자 A씨를 떠올렸다. 3.3㎡당 고시원 월세가 타워팰리스 월세보다 비싼 역설도 기억났다.

두루누비는 이 길을 “세련된 빌딩 숲속 남은 1980~90년대 건물과 당시 모습을 재현한 장소를 걸으며 현재와 다른 과거를 엿볼 수 있는 매력이 있는 코스”라고도 했다. 체험관에서 나와 남부순환로에 접어들었을 때 건축 양식이 거리 하나를 두고 갈라졌다. 아파트형 공장과 주상복합이 도로 오른편에, 오래된 양옥과 작은 공장 건물, 키치풍의 모텔 건물이 왼편에 들어섰다. 마리오아울렛 맞은편 구로봉제협동조합 건물은 1982년 지은 국내 최초의 아파트형 공장이다. 경비실은 노동자가 일하는데, 1982년 이후 한 번도 수리를 안 한 듯 보였다. 철근이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삐져 나왔다.

옛 건물 형태를 유지한 구로봉제협동조합(현 만승아울렛)

■밸리와 디지털로 가려진 거리

남부순환로와 디지털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디지털단지오거리다. 예전엔 가리봉오거리라 불렀다. 정부는 구로공단이니 가리봉이니 하는 이름들을 지우려 한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의 옛 이름도 가리봉역이다. 1997년 ‘구로단지 첨단화 계획’을 세우고,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개명했다.

이 오거리 주변의 ‘첨단 건물’ 몇몇은 ‘G밸리’란 이름을 붙였다. 구로·금천·가산의 ‘G’와 실리콘밸리의 ‘밸리’를 따서 만든 별칭이다. 한국산업단지공단과 전자신문이 2008년 이 이름을 함께 만들었다. 2년 뒤 구로구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경영자협의회가 ‘G밸리의 노래’를 발표한다. “누이들의 땀방울로 일으킨 한강의 기적/ 산학연관 하나로/ 구로금천 성공신화 클러스터/ 송이송이 활짝 핀 꽃이라네/ G밸리가 희망이요 G밸리가 행복일세/ 희망을 생산하는, 행복을 수출하는/ G밸리는 상상력이 샘솟는/ 창조공간 코리아의 심장이요 세계의 지식창고/ G밸리가 희망이요 G밸리가 행복일세.”

이 선전 노래엔 기만과 허위가 들어 있다. 2005년 시작된 기륭전자 파업 투쟁은 2010년까지 이어졌다. ‘구로의 등대’로 불리던 넷마블의 ‘장시간 노동 저임금’ 착취 사건이 알려진 게 2017년이다. G밸리니 디지털이니 하는 이름은 ‘누이들의 땀방울’을 내세우면서 ‘누이들의 피눈물’을 지운다. ‘동생들’의 고통도 가린다.

수출의다리에서 바라본 구로동맹파업 중심지 대우어패럴(현 현대아울렛)

가리봉오거리는 노동자들의 출퇴근 길목이자 휴식과 유흥의 장소, 투쟁 집결지이기도 했다. 노동단체들은 지금도 이 오거리를 1986년 구로공단 신흥정밀에서 일하다 분신한 박영진, 1989년 서광 구로지구 쟁의부장으로 근무하다 분신한 김종수 열사의 이름을 따 ‘박영진·김종수거리’라고 부른다. 김종수 열사의 마지막 외침은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였다. 분신 장소엔 지금 오피스텔이 들어섰다. 2012년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22번째 죽음을 추모하는 행진이 이 오거리에서 시작했다.

오거리에서 디지털로를 따라 내려오면 가산로데오거리가 나온다. 그 한 귀퉁이에 들어선 게 현대아울렛이다. 대우어패럴이 있던 자리다. 대각선 맞은편이 마리오아울렛이다. 효성물산 터다. 1985년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명, 효성물산 400명, 가리봉전자 500명, 선일섬유 70명이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구속자 석방’ ‘노동3권 보장’ 같은 구호가 내걸렸다. 로데오거리는 ‘수출의 다리’로 이어진다. 구로공단 2·3공단을 잇던 다리다. 이곳도 노동자들의 선전전, 거리행진 장소였다.

디지털로 위 수출의다리.

■곳곳에서 되풀이하는 ‘구로공단’

‘구로공단의 역사’는 도처에서 되풀이된다. 구로동맹파업 때 정부와 사측은 물도, 전기도 끊었다. 경찰은 농성 현장의 음식물 반입을 차단했다. 그 일이 LG트윈타워에서 벌어졌다. 사측은 ‘집단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걸고 로비에서 농성 중인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음식, 전기, 난방을 한동안 끊었다. 지난 2일 농성 중이던 노동자는 “현재까지 전기 중단. 춥고, 배고프고, 어지럽다. 무섭습니다”라고 적은 손팻말을 들었다. 80명의 노동자는 노조 가입 때문에 해고됐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한 김준희씨는 2014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항상 산업재해를 걱정하며 일했다고 했다. “미싱 바늘이 박힐 때가 많았습니다. 어떨 때는 ‘와자작’ 소리를 내면서 손톱이 부러지기도 하고 살에 박힌 바늘을 돌려서 빼내야 할 때도 있고요. 그 피투성이 손가락을 미싱 기름에 푹 담급니다. 그러면 피가 어느 정도 빠지게 되고, 다시 일을 하죠. 사람 걱정은 안 하고 그냥 제품에 피가 묻으면 안 되니까 하는 치료법이었어요. 무엇보다 라인은 돌아가야 하니까요.”

지금도 노동자가 다치고 죽어도 공장은 잘도 돌아간다. 국회에서, 청와대 앞에서도 산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두고 농성과 단식이 이어진다. ‘노동 존중’은 온데간데없다.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은 최근 ‘산재=바보 같은 죽음’이란 내용의 콘텐츠를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산재로 사망한 구의역 김모군을 폄훼하는 발언을 한 이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이케아는 스웨덴에선 상상할 수 없는 노동 착취를 한국에서 벌인다. ‘구로공단’을 역사로, 유산으로 박제할 수 없는 현실은 엄연하다.

‘금천구 역사도보투어’ 코스에서 한숨을 돌린 곳은 벚꽃로와 디지털로가 교차하는 ‘수출의 다리’부터다. 이곳에서 독산역까지 벚나무길이 이어진다. 유명 벚꽃 관광지로 갈 수 없던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경부선 철로 곁 시멘트 담벼락 따라 난 벚나무길을 걸으며 시름을 달래곤 했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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