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소부장 육성 공염불 되나..'중대재해법 강행'에 산업계 초비상

성승제 2021. 1. 6.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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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 시스템을 구축해도 교통사고 사망자 '0'을 만들 수 없듯이 산업재해를 완전히 '0'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열심히 노력 중인데, 무조건 잡아간다고 하니 이제 겁나서 국내에서 공장 짓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IT 부품 제조 대기업 관계자)

여야가 오는 8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처리를 합의한 가운데 산업계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국내에서 공장을 짓거나 국내 중소 협력사로부터 납품을 받는 것 자체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대기업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수백 개에 이르는 하청업체 가운데 언제 어디에서 사고가 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4년간 중대재해법 처벌 유예를 받은 군소 협력사가 만약 사고를 낼 경우 원청업체만 처벌받는 기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어서다.

◇'소·부·장' 육성 어쩌나… IT 제조업 고민= 이미 글로벌 최고 수준의 안전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가전,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첨단 IT 제조업체들은 국내 하청업체들을 해외로 돌려야 할 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금도 스마트공장 지원 등 하청업체들에 대한 안전관리에 각별하게 신경쓰고 있지만, 미세공정이 필요한 첨단 산업의 특성상 민감한 화학물질의 사용 빈도가 높아 언제 어디서 안전 사고가 일어날 지 장담하기 어렵다.

여기에 2·3·4차 협력사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구조를 고려하면 불안감은 더 커진다. 가령 한 대기업의 1차 협력사는 200여개에 달하며 여기에 2·3차 등 협력사들까지 합치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과거 유해가스 유출 사고를 경험했던 한 부품 대기업은 "현장 조사반도 어이없어 할 만큼 여러 불운이 겹쳐 사고가 난 것일 뿐 안전시스템에는 문제없다고 결론이 났다"며 "하지만 중대재해법이 통과되면 이 역시 처벌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또 다른 IT기기 제조업체 관계자는 "제품 박스 제조 하청업체에서 부주의로 불이 나도 원청이 책임지는 상황이라면, 결국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의 하청을 해외로 넘길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화평법·화관법에 중대재해법까지' 정유화학업계 초비상= 정유화학업계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유해물질 취급빈도가 높은 특성에 따라 안전시스템을 갖춘다고 해도 사고 가능성이 큰 편이기 때문이다.

특히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으로 이미 화학물질 취급에 대한 규제를 받고 있는 정유화학 기업들의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개인의 실수로 발생하는 사고까지 사업주에게 책임을 무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업의 경영활동 위축은 물론, 사고가 난다고 해도 이슈가 양형에 몰릴 가능성이 큰 만큼 안전문제 개선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규제가 정유화학업종의 중소기업에게는 더 부담이 큰 만큼 중소기업들의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은 필연적으로 중소기업으로부터 일부 제품을 납품 받아야하는데 중소기업이 무너진다면 생태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결국 중소기업의 빈 자리는 중국과 같은 해외 업체들이 메꾸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처벌 수위 상당한데"…건설·조선·철강업계 실효성 의문= 건설업계는 이미 다른 산업군에 비해 안전사고에 대한 처벌이 상당한 수준이라며 엄한 처벌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법률의 취지는 공감한다"면서도 "건설산업은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이나 건설기술진흥법을 통해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받는 처벌 강도가 다른 산업에 상당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건설현장은 옥외 현장이 대부분이고 불특정 다수가 일시적으로 모여서 하는 생산 구조인 데다, 날씨나 기후 영향도 다른 산업에 비해 영향을 많이 받는 등 다른 산업에 비해 불리한 환경인데, 엄한 처벌때문에 최고 경영자가 안전에 투자해 사고가 줄어들 것이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철강업계는 중대재해법에 대한 입장 표명에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국가기반 산업에 필수적인 제조업들의 경우 생산 구조상 도급이나 외주 등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은 채 관련 법률의 도입은 경영 리스크를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전자 제조업을 운영하는 A 사장은 "정부나 국회가 새로운 법안을 시행하면 공청회 등을 통해 다수의 의견과 여론을 수렴하는데 이번엔 그 과정도 생략된 것 같다"면서 "저도 기업인이지만 최근까지 중대재해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토로했다.

그는 "저 뿐만 아니라 다수의 중소·중견기업 사장들도 중대재해법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는 분들이 많다"면서 "이렇게 중요한 법안을 여론 수렴도 없이 급하게 시행하려는 의도를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박정일·성승제·박상길·김위수기자

comja7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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