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경계를 넘는 삶이야기
[정병호의 기억과 미래]
정병호ㅣ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국군 출신 할아버지와 인민군 출신 할아버지는 총부리를 맞대고 살아온 삶을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을까? 빨갱이 딸이라고 파혼당한 여성이 민간인을 학살한 군인의 딸을 안아줄 수 있을까? 북한 체제를 떠나온 탈북민은 남파 간첩 장기수의 신념을 존중할 수 있을까? 실제로 지난 8년 동안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이 진행한 ‘경계를 넘는 삶이야기’ 모임에서 거듭 경험한 일이다. 분단과 전쟁, 이념대립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그들은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당신도 고생했구려. 그런 처지에선 그렇게 했겠네요.”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며 위로했다.
이 모임은 다양한 배경의 참가자 6~8명이 한곳에 모여 1박2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모두가 공평하게 1시간씩 자신의 삶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이야기를 듣는 ‘공감대화’ 프로그램이다. 정치적 이념뿐만 아니라 성별, 학력, 직업, 출신 지역 등 사회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고루 참여하는 이 모임에서는 토론과 비판을 삼가고 판단을 유보하자고 했다. 참가자들 모두가 삶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존중받고 다른 사람의 삶도 존중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평등하게 점유하는 소통 조건을 구성했다. 늘 중심적 위치에서 큰 목소리를 내던 정치가, 목사, 교수 같은 직종의 중년 남자들은 이렇게 평등한 소통구조가 생소한 듯했다.
특히 한민족 이주민 참가자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온 소수자들의 생존전략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소련 체제 붕괴 후 연해주를 누비며 밀수를 해서 자식들을 교육시킨 사할린 동포 여성은 남한 식당에서 일하며 북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몰래 송금하고 있는 탈북 할머니의 이야기에 바로 공감했다. 조선족 할머니도 중국 대기근 시기에 갖은 방법으로 곡식을 감춰서 자식들을 굶기지 않았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해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낸 어머니들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며 모든 참가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식민과 분단 시대를 통해서 법 제도는 늘 지배집단의 편이었으니 남성보다는 여성, 공식보다는 비공식 생활전략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욱 큰 울림이 있었다.
삶이야기는 신기하리만큼 생생하게 한 사람의 삶의 맥락을 느끼게 해주었다. 실제로 1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은 그 사람이 겪은 삶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들려주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은 아닐 것이다. 무수한 과장과 생략, 그리고 허구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설사 사실이 아닌 허구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실제로 ‘보여주고 싶은 자신’,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한 갈구라는 점에서 현재의 그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삶이야기는 사회적으로 대립하는 다른 집단 사람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의 삶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존중받고 치유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또한 다른 집단에 속한 참가자의 삶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삶을 다른 관점에서 돌아보며 새롭게 이해하게 되더라고 했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서 다른 집단 사람들과도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경계 넘기’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각 세대의 문화를 비롯해서 정치적 입장, 경제적 이해도 심하게 양극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각 집단의 취향에 맞춘 편향된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만나고 교류하는 자폐적 소통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집단 간 갈등도 더욱 심해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여론재판의 광기가 휩쓸고 있다. 한마디 실언이나 한가지 실수로 사람을 규정하고 인격을 매도하는 일이 거침없이 진행된다. 제발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는 제발 청문회에 서지 않도록, 검찰 수사를 받지 않도록 해달라는 현실적 기도가 되었다.
삶은 모순적인 것이다. 사회가 정한 규칙대로만 살 수는 없다. 가상현실인 운동경기조차 반칙까지 포함한 전략적 게임을 하지 않나.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에 실수도 하고 죄도 짓고 남몰래 반성도 하고 용서를 빌기도 한다. 불완전한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단면만 보고 빨리 판단 내리기보다 느리더라도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로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존중하며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한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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