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우리의 슬픔을 소분할 수 있다면"..김수영문학상 첫 '비등단' 수상 이기리 시인 인터뷰
[경향신문]
시인 이기리(27). 지난해 11월 발표된 제3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는 아직 낯선 이름의 신인이었다.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이후 등단하지 않은 신인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처음이라 수상 발표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수상 시집이자 이기리의 첫 시집인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가 출간됐다. 지난달 29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이 시인은 “수상 전화를 받고 통화를 끊자마자 길바닥에서 15분을 펑펑 울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중1 때부터 시 쓰겠다 다짐했지만
신춘문예 잇단 낙선에 취업 고민
수상 소식에 길에서 ‘펑펑’ 울어
중학교 1학년 시절, 정호승의 ‘너에게’를 읽고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가 뭔지 잘 몰랐던 때지만, 막연히 너무 좋았어요. 관계에 대한 회의감을 많이 느꼈던 시기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에게 우산이 되고 싶었다’는 시구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힘을 얻고 살아가게 하는 문장들 중 하나였어요.”
이후 시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 문예창작과에 진학했고, 2018년 대학을 졸업했다. 마지막으로 신춘문예에 도전해보고 낙선하면 취업을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한 지난해 11월 어느 날, 김수영문학상 수상이라는 믿기 어려운 소식을 들었다.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을 때 왜 나한테 전화했지? 순간 그런 생각이었어요. 투고는 했지만, 저는 아직 작가도 아니었고 제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다음날 새벽부터 투고했던 원고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한 고민을 더 진지하게 하게 됐습니다.”
표제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차가운 교실 안 세계·상처 다뤄
‘충분한 안녕’은 독자 향한 인사
“타인 슬픔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
“울타리 같았던”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디딘 해, 불쑥불쑥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통증처럼 따라다녔고 몸도 자주 아팠다. 그 시절이 고스란히 시(詩)가 됐다.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표제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비롯, 여러 편의 시에서 학교폭력에 노출된 어린 화자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입꼬리들이 나를 천장까지 잡아당기는 기분/ 어때? 재밌지? 재밌지?”(‘구겨진 교실’). 차마 웃을 수 없는 상황 속 화자에게 ‘그 웃음’은 어쩌면 내가 갖지 못하는 무엇일 것이다. 화자는 웃음 대신 구름을 보며 “비를 맞는 표정”을 짓는다.
시 ‘싱크로율’은 상처뿐 아니라 어린 화자 내면의 격동과 혼란도 담담하게 들여다본다. “선풍기만 보면 왜 강풍으로 틀고 싶을까/ 그 앞에 앉아 왜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고 싶을까// 숨겨야 할 표정이 생길 때마다/ 서랍을 열면/ 이미 숨겨 두었던 정체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 시인은 “어린 시절 저를 둘러싼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 어떤 폭력의 잔해들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 시였다”고 말했다. 시인은 그렇게 과거의 상처를 가만히 응시하고, 어렴풋하게 떠오른 감정들을 시어로 옮겼다. “구름을 보며 짓는 비 맞는 표정, 그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표정이 어쩌면 제 유년 시절을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2018년 추체험하듯 떠올랐는데, 제가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이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마주한다면, 읽는 분들도 제 글쓰기에 설득되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교실 안의 세계, 상처를 들여다본 시들이 시집 초반부에 배치됐다면, “정확한 울음”(‘번안곡’)을 통과한 끝에 후반부에선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시인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시집 말미에 수록된 ‘충분한 안녕’에서 화자는 나에게로 잘못 날아온 원반을 아이들에게 던져준다. 그곳엔 “수많은 저쪽”이, “던지면 받아줄 수 있는 손들”이 있다. “빛의 모서리들을 껴안”은 원반을 던지며 비로소 시인은 “아프지 않은 모양”으로 안부 인사를 전한다. “이제 나는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그런 안녕의 둘레를 하고서”.
이 시인은 “제 시를 읽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은 시가 ‘충분한 안녕’”이라고 했다. “나조차도 돌보기 힘들었던 시절을 지나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다는 것을, 안부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돼 기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때 이 시가 나왔습니다. 어쩌면 그게 작가의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스스로에게만 함몰될 게 아니라, 타인에게 내 안부를 전하면서 다른 이들의 안부도 궁금해하는…. 그래서 충분한 안녕, 이란 인사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요. 저에게 많은 작가들이 그런 인사를 해줬거든요. 그건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제 첫 시집을 펴낸 시인은 “큰 상 수상에 부담감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소망해 왔던 것처럼 성실한 작가로 글을 쓰고 행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쓰기가 내 속의 아픔들을 조금씩 소분하고 있었”던 시인의 시간이 그랬듯, 그는 읽는 이들에게도 그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시가 누군가의 슬픔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나눠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 시가 슬픔을 소분해 나눠 짊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읽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너무 기쁠 것 같습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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