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에 동양정신 접목.. 세계가 평가"

장재선 기자 2021. 1. 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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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친구였습니다. 붙잡고 싶어요. 더 그릴 그림이 있는데, 왜 이렇게 떠나냐고 ."

8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창열 화백을 애도하며 박서보(90·사진) 화백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

김창열을 세계적 화가로 만든 물방울 그림은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박 화백은 "창열이의 사고력은 동양적"이라며 서양 미술에 동양정신을 새긴 친구의 그림 세계를 높게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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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은 지난 2016년 문화일보 파워인터뷰에서 “건강이 나쁘지만, 하루에 2∼3시간은 꼭 그림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물방울 대가’ 김창열 화백 타계… 70년지기 박서보 눈물의 애도

김환기 스승으로 만난 인연

추상미술하며 평생 우정지켜

“재작년 회고전때 보고 못 봐

휠체어 탄 모습에 눈물 쏟아”

- 김창열화백은…

1972년 물방울그림 첫선 호평

프랑스와 한국 왕래하며 활동

“참 좋은 친구였습니다. 붙잡고 싶어요. 더 그릴 그림이 있는데, 왜 이렇게 떠나냐고 ….”

8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창열 화백을 애도하며 박서보(90·사진) 화백의 목소리는 젖어들었다. 두 사람은 각기 ‘물방울 화가’ ‘단색화 거장’으로 세계 미술계에 이름이 높다. 1950년대에 급진적 추상예술 운동인 ‘앵포르멜’을 함께 한 이후 너나들이를 하며 평생 우정을 지켜왔다. 김 화백은 서울대 미대, 박 화백은 홍익대 미대 출신이지만 두 대학에 모두 재직했던 김환기를 스승으로 뒀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 화백은 김 화백이 만년에 몸이 불편해 요양병원에 있는 바람에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재작년 저의 회고전 때 창열이가 휠체어를 타고 왔더라고요. 그런데 건강이 나빠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어서 제가 눈물이 나더군요.”

프랑스 파리와 한국을 왕래하며 활동했던 고 김 화백은 노환이 깊어진 상태에서 감염병 사태가 터지자 외부에 나오지 못했다.

김 화백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7일 오전. 프랑스인 부인 마르틴 질롱 씨와 장남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며느리 김지인 씨가 조문객을 맞고 있다. 차남 김오안 사진작가는 파리에서 귀국을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29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6세에 홀로 월남해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검정고시로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해 학업을 중단했다. 1년 이상 제주에서 피란 시절을 보냈고, 그 인연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개관(2016)으로 이어졌다.

김 화백은 1965년 미국 뉴욕으로 가서 4년을 머물렀으나, 화가로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69년 파리로 거주를 옮겼고, 1972년 전시회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그림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세계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제가 1970년대에 파리에 갔을 때 창열이가 새벽에 차로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어요. 성품이 참한데, 운전은 난폭하더군요, 하하. 호텔 방을 얻은 후 화방에서 캔버스를 사서 함께 메고 갔던 게 떠오릅니다. 거리에 주차해 놓은 차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제가 ‘저게 얼마나 자연스럽냐. 황금분할 구도 같은 것은 무시해라, 이놈아’라며 농을 했던 것도 생각납니다.”

김창열을 세계적 화가로 만든 물방울 그림은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진짜 물방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붓질과 물감의 흔적만 있다. 1980년대부터는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고 한자체나 색점, 색면 등을 채워 넣어 동양적 정서를 살렸다. 1980년대 말부터는 인쇄체로 쓴 천자문 일부가 화면에 물방울과 공존하는 ‘회귀’ 연작을 내놨다. 유년기에 조부로부터 배운 천자문이 노년기의 작품 바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김 화백은 지난 2016년 문화일보 파워인터뷰에서 “달마대사가 면벽 수도하는 기분으로 몇십 년간 물방울을 그렸다”고 토로했다.

박 화백은 “창열이의 사고력은 동양적”이라며 서양 미술에 동양정신을 새긴 친구의 그림 세계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제 건강도 예전보다 못하지만, 떠난 친구 몫까지 열심히 그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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