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랄한 일제 수탈, '식민지속 식민지' 정읍 화호리 보고서

2021. 1. 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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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지 않는 전쟁범죄국' 일본의 한국 침략 당시,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는 '식민지 속 식민지'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농업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며, 이 시기 화호리는 정책 초기 이주지로 선정되면서 다수의 일본인이 이주했고 대규모 농장이 개설됐다.

현재 화호리에는 일제강점기,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와 다우에 타로, 니시무라 타모츠 등의 집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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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반성하지 않는 전쟁범죄국’ 일본의 한국 침략 당시,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는 ‘식민지 속 식민지’였다.

원래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정읍 화호리 일대는 과거부터 마을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먹을 것이 풍부했으며, 정읍, 김제, 부안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자영농과 상인들이 평화롭고 넉넉하게 살던 이곳에 일본이 침략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영구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필두로 농업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며, 이 시기 화호리는 정책 초기 이주지로 선정되면서 다수의 일본인이 이주했고 대규모 농장이 개설됐다.

화호리의 많은 농지와 대지 소유권은 구마모토 리헤이 등 많은 일본인에게 이전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자영농이었던 토착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곳에서 우리 농민들이 피땀흘려 생산한 쌀은 일제에 의해 수탈돼 동진강 나룻배에 실려 부안 백산면을 거쳐 군산항으로 간뒤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나라 전체가 일제의 총칼과 살육 속에 지배를 받는 것도 서러운데, 넉넉하던 이 곳 자영농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삶이 피폐해졌던 것이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이주하면서 이곳은 1914년 무렵, 면 행정 중심지가 된다.

암울한 시기 희망이었던 이영춘 박사의 화호병원터.

현재 화호리에는 일제강점기,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던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 리헤이와 다우에 타로, 니시무라 타모츠 등의 집터가 있다.

또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로 불리는 쌍천(雙泉) 이영춘 박사 관련 가옥, 창고, 사무소, 병원 등 건축물이 남아 있다.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한국에 와서 일약 지주가 된 일본인들은 식산은행에서 저리 융자를 받아 고리대금업으로 농토를 늘려나갔다고 한다.

정상적인 이민이 아닌 국가 주도의 경제범죄적 특혜 이주였고,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농민에게 전가됐다.

맨손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은행 돈을 지원받아 고리대금업으로 일약 지주가 된 일본인들의 옛 집. 이들이 지주가 되는 구조는 국가의 조직적 범죄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졸부 지주들은 일본인 경찰서장에게 돈 봉투를 돌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화호리가 일본의 침략 없이 발전했다면, 남 부럽지 않은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힘겨운 시기 이곳에 희망을 심은 인물은 이영춘(1903~1980) 선생이다. 그는 일제 수탈로 고통당하는 한국 소작농의 치료에 일생을 바친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이다.

그는 해방 후에는 열악한 농촌 보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않고 농장 시설물을 활용하여 입원실과 내과 등 5과 진료과목을 갖춘 화호중앙병원을 설립하였으며 현재도 이런 흔적이 남아있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의 화호리 보고서

문화재청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는 일제강점기 농촌수탈과 해방 후 농촌 보건의 역사가 남아있는 화호리를 대상으로 학술조사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6일 ‘일제강점기 농촌수탈의 기억 화호리’라는 보고서를 냈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조사 성과를 더 쉽게 이해하고, 교육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도록 화호리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6동과 해방 이후 공간변화 등을 디지털 영상자료로도 제작하였으며, 이 영상을 보고서에 정보무늬(QR코드)로 삽입하여 스마트폰 등 휴대기기로 재생하여 볼 수 있게 했다.

보고서는 국공립 도서관, 지자체 등에 배포되며, 문화재청(http://www.cha.go.kr)과 완주문화재연구소 인터넷(http://www.nrich.go.kr/wanju)에 공개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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