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이 '개똥'으로, 눈이 부신 아이들

이준수 2021. 1. 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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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어떻게 연극 수업을 하라는 거지? 나는 국어 지도서를 읽다 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차마 연극은 온라인 수업으로 돌릴 수 없어 귀한 등교 수업 주간에 넣었는데, 코로나 벽에 부딪혔다. 등장인물 간 접촉 최소화, 마스크 쓴 채 대사 말하기, 거리 확보. 흐음, 이걸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나는 접촉을 최소화한 언택트 연극을 하기로 결정했다.

“여러분, 올해 연극 수업은 대사가 중심입니다.” “말도 안 돼요!” 아이들은 언택트라는 조건을 듣고선 기운이 쑥 빠졌다. 몸이 닿지 않는 범위에서 동작을 이것저것 넣을 거라고, 웃긴 장면도 네 컷이나 들었다고 구슬려본들 소용이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리 반은 권정생 작가의 동화 〈강아지똥〉을 각색하여 대본을 짰다. 강아지똥은 힘도 약하고, 예쁘지 않다. 이야기 내내 울고, 참새와 병아리 그리고 흙덩이에게 무시당한다. 이런 이야기는 주인공을 캐스팅하기가 힘들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목소리가 중심이 되는 연극에서, 주인공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외부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낼 기회에는 지원자가 넘친다. 그런데 학급 공연은 조금 애매하다. 도드라지는 외적 보상이 없다. 이럴 때는 학급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반 분위기는 ‘이번 연극은 연극 같지도 않아. 누가 귀찮게 강아지똥을 해?’로 흘러갔다.

결국, 엑스트라 역할은 일찌감치 마감되고, 주인공 격인 강아지똥과 민들레만 남았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1200원을 주고 산 〈강아지똥〉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배우의 목소리로 등장하는 강아지똥을 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동영상 세대답게 영상물에 깊이 빠져들더니, 결국 J군 한 명이 손을 들었다. J의 요청 사항은 단 하나. “제 스타일로 연기해도 될까요?”

나는 순간 머뭇거렸다. 주인공을 맡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이긴 한데, J에게 연극을 맡겼을 때 벌어질 아수라장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J는 좋게 말해서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다. 자칫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J가 맡은 강아지똥은 원작과 사뭇 달랐다. 순박하고 여린 강아지똥은 세상의 독한 맛, 쓴맛 다 본 개똥으로 탈바꿈했다. 본인을 애송이 강아지똥 말고 어엿한 개똥으로 불러달라는 J의 활약은 눈부셨다.

“새해에는 마스크 벗고 연극할 수 있을까”

개똥의 분발은 민들레와 참새와 흙덩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 차례에 걸친 대본 리딩은 실제 리허설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었다. 흰둥이가 똥을 눈 자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아기 고추를 죽게 만든 흙덩이는 속이 시커멓게 타버린 듯했다. 연극 속에서 아이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정녕 상상력의 힘이란 말인가. 나는 기분이 묘했다. 사실, 교실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단순하다. 아이들은 반투명한 칸막이로 둘러싸인 책상에서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다. 심지어 각 책상은 시험 대형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어, 응집력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소리로 그리는 연극의 한 장면이 또렷이 보였다.

보름에 걸친 언택트 연극을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우리 반은 예전에 알던 그 반이 아니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의젓한 표정이 얼굴에 남았다. 온라인이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수업. 그간 온라인 수업을 하며 J와 친구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대견해 죽겠는데, J군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고.

아이들이 물었다. 새해에는 마스크 벗고 연극할 수 있을까요? 글쎄, 나는 대답을 끝내 들려주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이준수 (삼척시 정라초등학교 교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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