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모르는 목숨값, 규제로 알려주자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침, 삼성전자의 주가는 7만3600원이다. 삼성전자 주가가 7만3600원인 것은, 삼성전자 주식으로 이후 받게 될 현금(배당금)을 ‘현재가치’로 환산해서 합치면 그 값이 7만3600원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약간 풀어서 설명해보자. 지금 당신이 100만원을 갖고 있다면 그 돈이 1년 뒤엔 얼마 정도로 불어날 것으로 기대하는가. 그 액수가 100만원에서 10% 늘어난 110만원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1년 뒤의 110만원을 ‘현재가치’로 환산(할인)하면 100만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을 적용해서, 삼성전자 주식 한 장으로 내년과 2년 뒤, 3년 뒤(나아가 4년, 5년, 6년 뒤…)에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배당금을 추정한다. 그 배당금들을 각각 현재가치로 환산한 다음 합쳤을 때 지금의 삼성전자 주가가 나와야 하는 것으로 본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주식가격=현재가치(1년 뒤 배당금)+현재가치(2년 뒤 배당금)+현재가치(3년 뒤 배당금)+…
식의 왼쪽은 주식가격이다. 오른쪽은 ‘배당금 현재가치들의 합’으로 펀더멘털(fundamental)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식의 등호(=)는 ‘같다’라기보다 ‘같아야 적정하다’에 가까운 의미다. 즉 왼쪽의 주식가격이 오른쪽에 있는 ‘배당금 현재가치들의 합(펀더멘털)’보다 클 때, 우리는 그 주식이 과대평가(overvalued: 해당 주식의 시세가 타당한 가격보다 높음)되어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주식가격이 배당금 현재가치들의 합보다 작다면, 그 주가는 현재 과소평가(undervalued)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효율적 시장(efficient market)은 주가가 펀더멘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시장이다. 그런 가격을 ‘적정가격(fair price)’이라고 한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과대·과소평가되어 있는 주가는 빠른 시간 내에 펀더멘털로 수렴해 적정가격을 달성한다. 과소평가된 주식에서는 수요가 늘어나고, 과대평가 주식에 대해선 수요가 줄어들며 주가가 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주식이 있다. 모두 현재 1만원에 거래되고 있으며 1년 뒤에는 1만1000원의 현금을 ‘확실하게’ 보장한다. 두 주식 모두 위험이 없고 기대수익률도 10%로 똑같다는 얘기다. 두 주식의 차이는 기업이 ‘얼마나 착하냐’만 빼면 똑같다고 치자. A는 엄청나게 착한 기업이다. 사회사업이나 기부를 많이 하며 지역사회 공헌도도 높다. B는 갑질의 대명사다. 틈만 나면 자기들끼리 쌈박질, 남들에게 갑질을 해대는 통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밥맛 없어’ 하는 총수 일가가 경영권을 쥐고 있다. 그런데 총수 일가가 바로 얼마 전 또 사고를 쳐서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두 주식을 착한 A와 갑질 B라고 부르자. 당신은 갑질 B 한 주를 사기 위해 얼마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을까? 착한 A 가격이 1만원이고 위험이 똑같으니 그냥 갑질 B 가격도 똑같이 1만원이면 될까? 그럼 갑질에 대한 치솟는 분노는 어찌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당신은 절대 갑질 B에 착한 A와 똑같은 가격을 지불할 생각이 없다. 9000원도 많다. 훨씬 더 열받은 다른 사람은 7000원까지만 내겠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이 질문을 해보면 아예 1000원도 많다는 학생들이 꽤 된다. 무려 9000원을 ‘갑질 프리미엄’으로 깎아내리는 셈이다. 많이 깎을수록 자신의 정의로움이 더 많이 드러나는 줄 안다.
나쁜 기업이 시장에서 처벌받지 않는 이유
주식시장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아서 갑질 B의 주가가 예를 들어 7000원까지 폭락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상하겠지만 이제 갑질 B는 7000원에 사서 1년 뒤엔 1만1000원을 받을 수 있는 주식이 된다. 그런데 착한 A는 1만원을 주고 사야 1만1000원을 받을 수 있다. 이제 누가 착한 A 주식을 1만원에 사려고 할까? 7000원만 주면 똑같은 이득을 보장하는 다른 대안(갑질 B)이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착한 A가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가격이 7000원까지 떨어져야 한다. 이건 좀 이상하다. 도대체 착한 A가 뭘 잘못했길래 주가가 떨어져야 할까? 잘못한 건 갑질 B인데 왜 난데없이 착한 A가 두들겨 맞느냐는 것이다. 갑질을 처벌코자 한 당신의 정의로움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런 일은 적어도 효율적 시장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1만1000원의 펀더멘털이 바뀌지 않는 한, 주가가 1만원 밑으로 내려가면 갑질 B의 주가는 ‘과소평가’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이 줄을 서게 된다. 결국 갑질 B의 주가는 1만원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시장은 착한 A나 갑질 B나 같은 가격을 매긴다.
그렇다면 불매운동 등을 통해 갑질 B의 펀더멘털을 1만1000원 밑으로 깎아내리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소비자들이 마음을 모아 갑질 B에 대한 성공적 불매운동을 벌이고 그 결과 기업이익이 타격을 입는다면 갑질 B의 주가는 하락할 것이다. 이는 시장에 의한 자율규제(self regulation)다. 그러나 이런 자율규제는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과 처벌 의지를 사회구성원들 대다수가 충분히 공유하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처벌이 이루어지는 사례도 없지는 않다. 다만 이런 식의 처벌은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니 아주 ‘가끔씩만’ 벌어진다. 더구나 갑질 자체가 시장에 알려지는 것조차 어려운 경우가 태반이다. 기업에 대한 나쁜 정보가 시장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주주나 경영자들이 기를 쓰고 막기 때문이다. 하물며 갑질 B가 상장회사도 아니라면 시장이 이들은 벌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최근 들어 소위 ESG가 인기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ety), 기업지배구조(Governance)의 이니셜을 딴 용어다. 기업이 이윤추구만을 최상위 목표(‘프리드먼 독트린’)로 두기보다는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CSR)을 다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CSR을 시작했다고 할 수는 없다. 기업의 장기적 성장성과 지속가능성이 CSR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하에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해온 결과다. 다시 말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슈는 프리드먼 독트린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적어도 시장보다는 여론과 규제, 정책이 앞서 나갔던 이슈다. 우리가 기업이 CSR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중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CSR을 대세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파리기후협약에서 탈퇴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물러나면 새로운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의 거의 첫 공식 임무가 파리기후협약의 재가입일 것이라는 얘기가 꽤 믿을 만하게 들려온다. 단지 바이든이 트럼프보다 착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온실가스가 꾸준히 늘어나면 2100년쯤엔 뉴욕과 상하이, 뭄바이, 시드니 등 세계 주요 해안도시들이 물속에 잠길 수 있다는 예측이 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 지금 신경을 안 쓸 수가 있겠는가.
CSR이 각광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일 산업재해에 대한 무관심은 큰 미스터리다. 한국 경제의 눈부신 발전에 기여한 기업들의 역할 뒤에 수많은 산업재해와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숨겨져왔던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항상 한국의 기업들, 특히 재벌기업들이 회사를 위해 충성을 바친 직원들의 산업재해에 어떻게 그렇게까지 냉담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착각하지 말자. 예를 들어 대기업이 직원들에게 베푸는 복지는 낮은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복지’로 베푸는 풍부함은 산재 ‘예방’이나 피해에 대한 ‘보상’에서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재계의 불만은 여러 가지다. 산업재해 발생 시 법인과 경영진에게 책임을 물어 이들을 형사처벌할 수 있게 하고, 여기에 영업정지 등 행정제재를 부과하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는 등 강력한 처벌 규정들로 가득 차 있어 중복처벌, 과잉처벌의 위험이 너무 크다고 한다. ‘처벌을 강화한다고 산업재해가 줄어든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 ‘엄벌을 강조한다고 산업재해를 실효적으로 줄일 수 있겠느냐’ 같은 의문들이 제기된다. 이 법이 통과되면 높은 재해방지 비용으로 말미암아 문을 닫는 중소기업이 속출할 것이라는 등 볼멘소리도 높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 구체적인 행동기준을 제시해달라고도 한다. 특히 2018년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만 해도 충분히 강력한 법률인데, 굳이 더 강력한 새 법안을 만드는 것은 과잉 입법이라는 불만도 들린다.
중대법이 산안법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제재를 들고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이 법이 경영자가 안전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범죄’로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산안법은 산업재해를 ‘실수’로 본다. 실제로 산안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경우 과실치사상죄가 적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고등학생이 일진에게 ‘잘못 걸려’ 폭행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 그 일진에게 분노를 표시한다. 동시에 어떤 대처도 하지 않은 다른 학생들과 교사, 학교를 탓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일진의 폭행을 몰랐거나 혹은 알고 있는데도 굳이 눈을 감고 있었다면 그런 교사와 학생들은 폭행에 수동적으로나마 동조한 것이 아닐까. 적어도 폭행을 방조한 책임은 면하기 어렵지 않을까? 여기에 ‘일진에게 당하지 않는 법’ 같은 ‘구체적인 행동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문제는 안전수칙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바꾸기 위한 가장 기본적 조건은 당연히 최고경영자의 의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산재가 쳇바퀴처럼 반복되며 개선되지 않고 있다. 더 강력한 제재가 아니고는 산재 발생을 막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제도적으로라도 강제하겠다는 것이 중대법의 입법 취지다.
미국에서는 엔론 사태(2001년 세계 최대의 에너지 기업인 엔론이 파산을 신청하면서 대규모의 의도적 회계부정이 드러난 사건) 이후 회계장부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베인스-옥슬리 법(Sarbanes-Oxley Act)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경영자는 기업공시 내용을 직접 확인해야 하며, 문제 발생 시엔 실무자보다 경영자 개인에게 책임을 묻게 되어 있다. 하물며 산재는 사람 목숨에 관한 것이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40명이 사망했다. 2020년의 이천 냉동창고 화재로 다시 38명이 사망했다. 우연이 두 번이라 같은 곳에서 번개를 두 번 맞았다고 생각하는가. 산안법 위반 재범률은 무려 93%라고 한다(박선영, 2020. ‘재무제표로 살펴본 기업의 산재 예방 투자 효과’ 산재 예방 연구 브리프). 이쯤 되면 산재는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다. 해안도시들이 물에 잠기기 훨씬 전인 바로 지금, 일터에 컵라면을 남기고 죽어가는 김용균은 매일 나온다.
이런 작업장에서 일하는 것은 현장 책임자들이 노동자들을 위험한 곳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도록 작업장이 애당초 잘못 설계된 탓이다. 이렇게 잘못 설계된 일터가 너무 많다. 노동자들이 그 잘못된 일터 대신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는 대안 선택지는 없다. 그러니 이 문제는 현장에 안전수칙이나 행동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시장은 대개 정부보다 효율적이다. 그러니 산재 또한 시장을 통해 제대로 규제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사람 목숨을 모른다. 목숨값을 가격에 반영할 줄 모른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착한 A와 갑질 B 두 주식에서 갑질 B를 ‘산업재해 B’로 바꾸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산재의 많은 부분은 상장조차 되지 않은 중소기업들에서 나온다.
ESG가 필요조건이 된 것은 규제를 통한 강제가 시장을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를 시장이 처벌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정책과 규제가 시장을 앞서야 한다. 의원들은 자신이 금배지를 달고 있는 것은 시민들이 이런 일을 하라고 힘을 실어준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 몇 년 전 청소 노동자가 전철 역사의 좁은 난간 위에 위태롭게 엎드려 창틀을 닦고 있는 사진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저 노동자를 안전한 지상으로 내려보내기 바란다. 아니면 의원 당신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오든가.
이관휘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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