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무환] 덴젤워싱턴, 21세기 최고 배우를 위한 짧은 찬사

윤필영 2021. 1. 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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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무환(無患) : 영화를 보면 근심이 없음을 뜻한다

[텐아시아=윤필영 기자]

'더 이퀄라이저' 덴젤워싱턴./ 사진=네이버무비


최근 미국 뉴욕타임즈는 21세기 최고 배우 25명을 선정했다. 몇몇 영화 평론가들이 함께 참여한 이 선정 작업에서 우리나라 배우로는 송강호(6위)와 김민희(16위)가 포함됐다. 각 대륙별, 국가별 안배도 작용한 영향으로 일부 순위 산정에는 이견도 있었지만, 1위 배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덴젤 워싱턴이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후드 가운을 입은 복서가 펄럭이는 나비처럼 쉐도우 복싱을 하는 <분노의 주먹(Raiging Bull)>의 첫 장면을 연상하듯, 등에 ‘RUBIN’이라는 이름이 박힌 가운을 입은 복서가 링에서 경쾌한 동작으로 몸을 푸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어 후드 아래에서 드러나는 흑인 청년의 매서운 눈매. 노만 주이슨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 <허리케인 카터, 2000>의 오프닝 신이다. 백인의 인종차별 때문에 22년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한 실존 인물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삶을 다룬 이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은 46세의 나이에 20대 후반 권투 선수 역을 맡았다. 

감독도 내심 걱정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그는 1년 이상 매일 10km씩 뛰며 체중을 18kg이나 감량하고, 6개월 동안 매일 2시간씩 권투선수로부터 권투를 배웠다. 그가 왜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실한 배우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지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실제 영적 체험을 했을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슬리퍼를 침대 밑에 넣어 둔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슬리퍼를 꺼내기 위해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덴젤 워싱턴이 배우로 성공하는 데는 신중한 배역 선정도 큰 몫을 했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분명한 메시지, 캐릭터의 개성이 명확히 드러나면서 반전의 묘미가 있는 영화를 고른다. 실존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된 역할을 선호하고 인물에 대해 철저한 연구를 한 뒤에야 촬영장에 나타난다.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삶도 반전의 스토리로 충만하다.

의학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법학으로 바꿨다가 저널리즘으로 또 옮기고, 방황을 거듭하다 1.8의 학점과 함께 학교 측으로부터 권고 휴학을 받게 된다. 휴학 직후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일을 돕던 중 그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면서 영매끼가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할머니는 거울 너머로 덴젤 워싱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가 평생 잊지 못할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너는 전 세계를 여행하고, 수백만 명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게 될거다"라고. 그해 말 그는 YMCA 캠프에서 일을 하다가 참가자들을 위한 쇼를 하나 열었는데, 쇼가 끝난 뒤 다른 직원이 그에게 다가와 "혹시 연기해볼 생각 없니? 너는 해야 돼"라는 말에 힘을 얻어 대학에 돌아가 다시 한번 전공을 바꾸곤, 결국 영화를 통해서 할머니의 예언을 실현하게 된다.

영화 '영광의 깃발' 포스터


덴젤 워싱턴이 배우로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광의 깃발(Glory), 1989)을 통해서다.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이 창설한 흑인부대 매사추세츠 54연대의 절반 가량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했던 와그너 요새 전투를 바탕으로 한 이영화에서 그는 평소엔 불만 많고 껄렁거리지만 백인 지휘관이 숨지자 전장의 최선봉에 서는 흑인 병사 트립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덴젤 워싱턴의 얼굴에선 윗니를 다 드러내 놓는 커다란 웃음과 함께 눈빛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중 트립은 군화를 얻기 위해 부대를 잠시 이탈했다가 탈영병으로 몰려 모진 채찍질을 당하게 된다. 비명 한마디 내지 않고 묵묵히 견디어 내다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구는 장면에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그 인상적인 눈빛. 흑인들에게 응어리져 있는 설움 분노 증오가 그대로 전달되는 DNA적 연기가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 같다. 

하버드대 역사학 전공 출신 답게 <라스트 사무라이> <세기의 매치> <가을의 전설> <블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계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에 천착해 온 즈윅 감독은 걸프전을 배경으로 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다시 한번 덴젤 워싱턴과 호흡을 맞춘다. 

덴젤 워싱턴을 가장 아낀 감독은 단연 토니 스콧이다. 덴젤 워싱턴은 <크림슨 타이드,1995>, <맨 온 파이어, 2004>, <데자뷰, 2006>, <펠헴 123, 2009>, <언스토퍼블, 2010> 등 스콧 감독의 영화 5편에 주연으로 출연해 그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CF 감독 출신인 스콧 감독이 만든 이들 영화는 사실 단편적인 플롯을 갖고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설정해 놓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감을맛보게 하는 것이다. 핵무기 발사로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상황에 처한 <크림슨 타이드>를 비롯해 소녀 납치사건(맨 온 파이어), 선박 폭발 사건(데자뷰), 지하철·열차 사고(펠헴123, 언스토퍼블) 등 비슷한 구조다.

영화 '맨 온 파이어' 포스터./


덴젤 워싱턴은 이들 영화에서 과묵하고 신중하며 급박한 상황에서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를 발휘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소녀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꾸는 정의의 사도 역할을 한다.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 똑 부러지는 발성과 발음이 그가 맡은 영웅적 캐릭터와 딱 들어맞는다. LA의 빈센트 토마스 다리에서 투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68세에 생을 마감한 토니 스콧의 유작이 <언스토퍼블>이었으니 두 사람은 관계는 참으로 숙명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가져다 준 배역은 정반대의 캐릭터였다. 안톤 후쿠아 감독의 <트레이닝 데이, 2001>에서 LA 경찰청 13년 경력의 타락한 마약 수사관 아론조 역이다. 비열하고 부패한 베테랑 경찰의 밑바닥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내 악역마저 자연스레 소화하는 연기력을 인정받으면서 2002년 제74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흑인 배우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은 1963년 시드니 포이티에 이후 39년 만이었으며, <영광의 깃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을 포함하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조연상을 모두 수상한 최초의 흑인 배우가 됐다.

덴젤 워싱턴의 폭넓은 연기력은 <아메리칸 갱스터, 2007>, <플라이트, 2013> 등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토니 스콧의 형이자 당대 최고의 비쥬얼리스트 리들리 스콧의 수작 갱스터 무비다. 뉴욕 최대의 마약 거래상이었던 프랭크 루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덴젤 워싱턴은 강인하지만 냉혹한 마약 조직의 보스의 흥망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가정도 포기한 채 직업정신 하나로 살아가는 형사 리치 로버츠 역의 러셀 크로우와의 정면 대결은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에서 은행강도 로버트 드 니로와 강력계 반장 알 파치노와의 끝장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캐나다 조종사의 실화를 소재로 한 <플라이트에>서 능숙한 비행 기술을 가졌지만, 알코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조종사 역할 역시 평소 그의 이미지와는 꽤 다른 것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를 보면 배역을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한 덴젤 워싱턴이 왜 이들 역할을 맡게 됐는지 이해가 간다. 아메리칸 갱스터에서는 체포된 뒤 흡사 경찰이 된 듯 부패 경찰의 소탕에 신명이 나고, 플라이트에서는 눈 딱감고 'no'라고 하면 살아날 수 있는 순간에 타인의 명예에 오점을 주지 않기 위해 진실을 수용하는 모습에서 패자의 역할을 맡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한다.

'더 이퀄라이저' 포스터./


덴젤 워싱턴이 안톤 후쿠아 감독과 다시 짝을 이뤄 액션 배역의 정수를 보여준 <이퀄라이저, 2015>는 마크 트웨인의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날은 네가 태어난 날과 네가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 날이다" 덴젤 워싱턴은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된 지금에서야 어머니 미용실에서 만난 할머니의 예언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알게 된 날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 과정에는 무수한 실패의 반복이 있었다. 오디션때부터 음치라고 떨어지고, 상대역을 맡은 지원자가 오버하는 바람에 또 떨어지고, 그렇게 떨어지고 또 다음을 준비하기를 거듭하면서. 2011년 아이비리그 명문 펜실베이니아대학(UPenn) 졸업식 연설자로 나선 그가 졸업생들에게 던진 말이 그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앞으로 넘어져라(Fall Forward)" 

글. 윤필영
주말 OTT 뽀개기가 취미인 보통 직장인. 국내 한 대기업의 영화 동호회 총무를 맡고 있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시각으로 영화 이야기를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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