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잊고 눈처럼 나비처럼 훨훨 날아라

한겨레 2021. 1. 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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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픽사베이

첫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하얀 나비들이 너울너울 내려온다. 눈 깜박이고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새하얀 새잎이 하늘하늘 내려온다. 저것을 눈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비라고 부르거나 새잎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나비와 하얀 새잎을 보면서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너무 반가워 손을 내미니 연기처럼 사라진다. 어디로 갔을까 두리번거리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내 손을 잡아 준다. 옥수수 낱알이 강냉이가 되는 것처럼 그리움의 씨앗도 펑하고 터져 눈물이 되는 모양이다.

첫눈 내리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 펄펄 날리는 하얀 새잎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그때 그 시절, 그녀도 외로웠고 나도 외로웠다. 첫눈 내리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던 그녀에게 첫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잎이라고 말해 주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꼭 안아 주었지. 그 따뜻한 품속을 잊지 못해 고이 간직하고 살아온 지 3년, 첫눈 내리던 어느 날 나는 기차 타고 하얀 눈밭을 찾아 나섰다. 설악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나 그건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어디론가 새하얀 새잎이 쌓인 곳을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차를 타고 가다가 하얀 눈밭이 보이면 어디에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하였다.

아마도 일영 아니면 송추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산언덕에 잘생긴 소나무가 있었고 그곳에서 보면 하얀 겨울 들판이 보였다. 발이 가는 대로 찾아간 것이지만 결국 그것은 어디선가 날 부르는 그녀가 있었기에 그리된 것이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하얀 새잎이 쌓여있는 들판 위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피어올랐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이 필요 없었다. 이미 내 눈에서 반짝이는 기쁨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것을 사랑이 아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에서도 반짝이는 그 무엇이 피어났는데 나는 그것을 슬픔이 피운 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 픽사베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16살이었고 그녀는 19살이었다. 깡패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녀의 집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어둠이 내리면 내 방의 작은 창에서 그녀가 살고 있는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어떤 날은 창에 비친 그녀의 가련한 그림자를 보았고 어떤 날은 그녀가 창을 열고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기도 하였다. 그녀의 작은 창은 늘 슬퍼 보였다.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그녀의 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기도 하였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에는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기도 하여 불 꺼진 창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가끔 나는 그녀의 밥 심부름(주말마다 나는 식당에서 배달 일을 했다)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세상에서 격리된 사람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난 그냥 그녀를 아껴 주고 싶었고 그녀는 그저 나를 다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걸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사랑이라는 그림에 억지로 꿰맞추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히 고마웠다. 하지만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못하면 푸른 하늘도 흐린 하늘이 되어야 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집까지 비를 맞고 걸어가는데 집 근처 건널목에서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내 어깨를 잡아 주던 날이었다. 비가 내리는데 이 따뜻함은 어디서 품어져 나오는 것인지, 창가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늘 슬퍼 보였는데 이렇게 따뜻한 사람일 줄이야.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몸을 팔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나이가 19살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그녀의 사연도 알지 못했고 이름도 알지 못했다. 난 그저 거기에서 그녀를 구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 무렵 그녀가 내게 말했다. 첫눈 내리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그녀를 알게 된 지 한 달이 채 안 되서 내 가슴에 지진이 일어났다. 학교 갔다가 집에 왔는데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지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사랑이 뭔지는 몰랐지만 아끼고 싶었던 여자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온통 먹구름으로 보였다. 그녀를 구해 주지 못한 것이 한으로 맺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 남긴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나비를 샀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도 사고 나무로 조각한 나비도 샀다. 죽어서 나비로 태어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하늘에서 새하얀 나비들이 춤을 추며 내려왔고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사진 픽사베이

그렇게 나비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살던 어느 가을날, 나는 입영 통지서를 받고 훈련소로 떠났다. 훈련소는 치악산에 있었는데 거기는 겨울이 일찍 찾아왔다. 눈보라 치던 어느 날 밤, 단체 기합이랍시고 팬티만 걸치고 연병장을 도는데 동작이 느리다고 서럽게 얻어터졌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밤하늘에서 하얀 나비와 하얀 새잎이 춤을 추듯 내려왔다. 연병장에 쓰러진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첫눈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때 나의 추운 마음을 새잎이 덮어 주었고 하얀 나비가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세상이 어지러운 건지 내가 어지러운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밤, 그녀는 그렇게 나를 지켜 주었다. 그녀는 옛 시절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나이를 먹었는데 그녀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그녀보다 세 살 많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하얀 새잎은 봄날의 기쁨으로 이어져 나무마다 새잎을 돋게 한다. 적어도 우리네 인간들은 일 년에 두 번 순수를 만날 수 있다. 첫눈으로 내리는 하얀 새잎과 봄날에 피어나는 파란 새잎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근무를 하던 어느 봄날 나무마다 파란 새잎이 돋아났다. 내 가슴에도 뭔가 돋아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내 가슴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나비가 말했다. 이제는 자기를 잊어도 된다고. 그렇게 그녀는 환한 웃음을 남기고 너울너울 날아갔다. 저만치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는데 내 마음에 새하얀 새잎이 쌓이기 시작했다. 때 아닌 계절에 첫눈이……

첫눈 내리면

거기서 만나자

하얀 마음으로

그리움은 눈물이어라

멍든 가슴에

시든 꽃망울

하얀 새잎들이

음음 어루만져 주네

가난했던 날들이여

눈물어린 날들이여

그리워라 보고 싶어라

지난날의 슬픔들이여

사랑아 돋아라

꿈도 돋아라

하얀 새잎 위에

음음음, 곱게 피어라

-「첫눈」, 1984

글 한돌/<홀로아리랑>,<개똥벌레>,<터>,<조율>을 작사·작곡한 치유음악가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만드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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